봄은 어디에서부터 오고 있는지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2월 동료교사들과 남도의 끝자락 거문도와 백도를 가려고 고흥군 나로도 항으로 갔다. 거문도는 섬 일대가 해상국립공원으로 여수와 제주도 중간 지점에 위치한 다도해의 최남단 섬이다. 거문도에는 섬과 바위가 천하절경으로 남해의 해금강이라는 백도(百島)와 건립한지 100년이 넘는 등대가 유명하다.
거문도 등대는 40km까지 불빛이 나가는 동양 최대 규모의 등대이다. 등대에 오르는 길은 잘 조성된 산책로 같고, 동백나무숲은 하늘이 보이지 않을 만큼 울창했다. 겨울 해풍을 잘 이겨낸 동백나무의 선분홍색 꽃송이는 봄 향기를 머금고 우리를 유혹했다. 동백꽃 숲을 지나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는 새하얀 등대건물은 파란바다와 신선한 색의 대비를 이루며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하게 한다.
거문도를 떠나 보성군 녹차 밭으로 이동 중 겨우내 자란 연두색 보리밭 들판은 봄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보성군과 하동군 쌍계사 주변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차(茶)를 재배하는 지역이다. 차(茶)는 도자기 그릇에 우려내야 제 맛을 낸다. 특히 청자로 된 녹차 잔을 최고로 알아준다. 고려가 건국되기 전 호족들과 선종 스님들이 청자 잔에 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고려시대 귀족들은 다원(茶園)이나 사랑방에서 청자 잔에 녹차를 즐겨마셨다. 도자기 기술은 중국 오나라로부터 전수되었는데, 국내 여러 곳에서 청자를 구웠지만, 강진군이 도자기용 흙과 땔감인 소나무가 적합하여 강진에서 청자를 많이 구웠다. 그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도자기 예술이 발달하게 된 것 같다.
해마다 봄이 오는 길목, 차 밭에서는 첫물 녹차 수확을 한다. 차의 최고급 우전(雨前)은 곡우(穀雨)전 이른 봄에 만든 녹차로써 그해 처음 딴 찻잎으로 만들었다. 청자 잔에 정겨운 친구와 차 한 잔 마시며, 우리 모두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자. 감사는 긍정의 토양에서 자라는 줄기식물 같고, 감사는 하면 할수록 한겨울 내내 자라는 녹차 밭처럼 푸르게 뻗어 나가는 무궁무진한 생명력을 지녔다.
소설가 김홍신은 뜨거운 물이 되자고 했다. 뜨거운 물은 사랑이고, 배려이며 나눔이고 기쁨이라고 한다. 뜨거운 물이 되어야 진정한 벗을 얻는다니 여유를 갖고 따끈한 차 한 잔하며 마음을 녹여보자. 초조함과 긴장, 갖가지 경쟁 속에 사는 우리에게 여유는 무엇보다 절실하다. 여유를 가진 자가 성공 인생의 지름길로 간다. 여유를 가지면 침착함과 원숙미가 쌓이게 되고, 긴장을 푼 후의 따스한 녹차 한 잔은 색다른 즐거움이다.
필자는 학교에서 하동군 쌍계사 부근에서 채취한 야생 우전 차를 항상 곁에 두고 있다. 일곱 잔을 마시면 선의 경지에 오른다는 속설도 있고, 여러 번 우려 나누어 마실 수 있으니 마음 또한 넉넉하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게 현대인의 일상이지만 삶의 속도를 늦추고 살자. 우리 모두 천천히 청자 잔에 따스한 차 우려마시며 마음을 녹여 보자. 봄은 남도의 거문도로부터 올까. 보성군 녹차 밭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