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시선집중, 이종성기자] 5월 1일 새벽, 예순 한 살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정해원은 1980년대 한국 축구를 수놓았던 최고 스타플레이어 중의 한명이다.
1959년 서울에서 3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가 유명 제약회사 ‘종근당’의 사장을 지낼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한다. 무작정 축구가 좋아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수의 길을 선택한 그는 축구 명문 안양중학교와 안양공고에서 기량을 닦았다.
공격수로 탁월한 재능을 과시한 정해원은 고교 무대에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1978년 고교 3학년 때 ‘안양공고의 정해원’과 ‘대전상고의 이태호’를 모르면 축구팬 취급을 못 받을 만큼 특급 유망주로 각광을 받았다.
정해원은 청소년 대표팀의 일원으로 1978년 가을 방글라데시에서 열린 아시아 U-19 청소년 대회에 출전했다. 장외룡, 박항서, 김석원 등과 함께 15년 만에 이 대회 우승을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1979년 연세대 입학과 함께 국가대표 2진인 충무팀에 뽑혔고, 이듬해인 1980년 드디어 국가대표팀에 발탁됐다. 모스크바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참가해 비록 본선 진출에는 실패했으나, 왼쪽 윙어로서 나이에 걸맞지 않는 노련한 플레이를 선보였다.
1980년 5월은 대한민국 역사에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때이기도 했지만,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골이 탄생한 달이기도 하다. 5월 14일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연세대 2학년 정해원은 후반 중반 하프라인에서부터 단독 드리블을 시작, 국가대표급 수비수가 즐비한 상대 육군팀 선수들 5명을 제친 뒤, 골키퍼까지 따돌리고 골을 성공시켰다. 마치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가 터뜨린 50미터 드리블 골과 흡사했다. 이 득점 장면은 TV로 생중계됐으나 지금은 영상이 남아있지 않아 올드팬들에게는 ‘전설의 고향’같은 골로 남아있다.
몇달 뒤인 19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 북한전을 통해 정해원의 이름 석 자가 확실히 알려졌다. 0-1로 뒤진 상황에서 후반 35분 헤더 동점골에 이어, 종료 1분전 왼발 터닝슛으로 골네트를 갈라 드라마 같은 2-1 역전승을 이끌었다. 북한을 ‘북괴’라고 부르며 필사적으로 대립하던 그 무렵, 역사적인 남북 축구 A매치 첫 승리의 영웅이 된 것이었다. 귀국하자마자 그는 각종 TV 예능 프로그램에 단골로 출연하며 꿈같은 날들을 보냈다.
부드러운 드리블 돌파와 센스 넘치는 볼 컨트롤, 예측 불허의 슈팅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1981년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서 180도로 몸을 회전한 뒤 절묘한 드롭슛으로 골을 성공시키자, 대회에 참가했던 남미 클럽팀의 지도자들은 ‘브라질의 일류 선수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골’이라며 극찬했다.
1983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한 정해원은 마침 출범한 프로축구 수퍼리그에서도 무르익은 기량을 뽐냈다. 1984년 LA 올림픽 예선에는 대표팀의 주장으로 뽑혀 최순호와 함께 팀의 에이스가 됐다. 그해 연말에는 대우 로얄즈를 프로축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의 대표팀 경력은 1985년에 접어들자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활동량이 적고 투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발목부상까지 겹쳐 결국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엔트리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독기를 품은 정해원은 그해 가을 프로축구에서 두 경기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득점왕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다음해 1987년에는 소속팀 대우 로얄즈의 주장을 맡아 팀의 두 번째 우승과 함께 자신은 MVP에 올랐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한 그는, 이어 열린 카타르 아시안컵에서도 대표팀 캡틴으로서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 안타깝게도 정해원은 점차 팀의 계륵 같은 존재가 됐다. 기량은 여전히 뛰어났으나 떨어지는 체력이 발목을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본선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활약이 미미했다. 10년간 입었던 대표팀 유니폼을 미련 없이 벗은 그는 이듬해 시즌 도중 갑자기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A매치 통산 66경기 22골, K리그 통산 154경기 34골.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축구 천재’의 화려한 데뷔에 비해서는 조금은 빛이 바랬던 피날레였다.
곧바로 대우 로얄즈의 트레이너가 됐지만 지도자 생활은 그의 자유분방한 스타일과는 맞지 않았다. 결국 어느 팀에도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10여 년 전부터는 축구계의 야인이 됐다. 술을 너무 좋아했던 그는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이 때문에 가정생활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아들 한 명을 유족으로 남겼다.
1980년대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로서 축구팬들에게 환희와 영광, 경탄의 순간은 물론, 애잔한 아쉬움도 함께 선사한 정해원. 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