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외숙(수필가)
신록이 짙어지는 5월이다. 간편한 복장에 배낭을 메고 나서니 마음마저 가볍다.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4시간 30분 만에 고향 읍내에 도착했다. 읍에서 집까지 거리는 2키로 남짓 된다. 택시를 탈까 망설이다가 걷기로 했다. 농사철에 맞춰 봄비가 내리고 있다. 가져온 우산이 제값을 한다. 길은 차도와 인도, 그리고 꽃길로 구분되어 잘 정비되어 있다. 큰길을 따라 절반쯤 걸으면 오른쪽 산길로 접어든다.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린 학창 시절의 이 길은 고난의 행군 같았다. 비 오는 날은 자동차가 보내는 흙탕물 세례를 받아야했고, 들길의 진흙은 발목 모래주머니처럼 신발에 달라붙어 걸음이 나아가지 못하게 붙잡았다. 버스가 지나간 뒤 흙먼지 속의 매연 냄새, 여름날 화살 같은 따가운 햇살과 겨울의 북풍한설은 어린이가 받아내기에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한길을 지나면 험한 바위로 덥힌 산길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 했을 때는 비나 눈이 오면 혼자서 다니지 못했다. 사선으로 비탈진 길은 코고무신에 싸인 발가락의 근육과 신경이 비렁 속까지 파고들었다. 그런 날은 큰길로 돌아서 가야 했다. 물론 두 배로 긴 거리와 시간은 온전히 어린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가면서 이 길은 우리만의 놀이터이면서 아지트가 되었다. 지금 세월을 논할 수 없는 지나간 시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산을 깎아 만든 넓은 길이 고즈넉하다.
따스한 봄날에 학교를 파하고 몇몇 친구들과 집을 향해 느리게 걷는다. 산길을 들어서면 걸음은 열 배쯤 더 느려졌다. 시간을 바위에 묶어두고, 쌀보리 게임이나 묵찌빠 놀이를 하고 때로는 친구와 싸우기도 했다. 비렁 길이 끝나는 지점의 언덕에는 무수히 많은 삘기가 연한 속살을 품고 하늘을 향해 돋아있다. 삘기는 우리들의 또 다른 주전부리였다. 삑 하고 뽑히는 느낌과 씹으면 달콤하고 쫀득쫀득 껌으로 변하는 삘기. 한입 가득 물고, 집에 있는 동생 몫으로 다시 한 손 가득 뽑는다.
여름이 되면 산에서 내려온 뱀이 앞길을 가로막을 때도 있다.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누워 있거나, 어떤 날은 둥글게 똬리를 틀고 협박을 하듯 무섭게 노려본다. 짓궂은 머슴애들은 돌을 던지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은 먼저 산길에서 놀던 악동들이 뱀의 꼬리를 잡고 빙빙 돌릴 때이다. ‘니 내 앞으로 지나가기만 해봐라 이 손 나아 삐끼다’ 끔찍하고 소름 끼치는 순간이다. 그놈이 손가락을 살짝 떼면 뱀이 휙 날아와 내 목에 감길 것 같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뱀이 제일 무섭다.
여름날의 하굣길은 해가 서쪽 산등성을 향해 걸음 재촉하고 칼날 같은 햇살이 무뎌질 때쯤이다. 산 아래로 뻗친 바위의 끝이 냇물과 맞닿은 지점은 두 개의 물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상당히 깊었다. 우리들은 책가방을 비렁 위에 던져두고 옷을 입은 채로 물속에 풍덩 뛰어들어 멱을 감고, 물귀신 놀이도 한다. 신나게 놀다가 귀신의 전설이 살아나기 전 물을 줄줄 흘리면서 집을 향해 뛰었다. 내가 다니던 비렁 길의 왼쪽 냇물은 물귀신의 신화가 숨어 있고, 오른쪽 산은 도깨비 설화가 살아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해가 지고 난 뒤 이 길을 통과 할 때는 다리에 백 마력의 엔진을 단 듯 저절로 걸음이 빨라진다. 성장하면서 사춘기의 질곡 같은 학창 시절을 비렁 위에서 절망했고, 꽉 막힌 마음은 비렁 위에서 한숨지었다.
고향을 떠나면서 이 길을 걷지 않았다. 변화된 교통수단이 빠르고 편하게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지금은 차가 서로 비껴갈 수 있게 넓게 포장되어있다. 냇가 쪽으로는 안전을 위한 난간까지 세워져 있다. 산에서 내려와 길에서 잘리고, 다시 산 아래 냇물 속으로 파고 들어간 비렁은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채 묵묵히 빗물에 젖어 있다. 다만 그때의 깊은 냇물은 자갈로 채워져 얕은 개울로 변해버렸다. 예전의 우리 집은 동네에서 제일 아랫집으로 통했지만, 이 길에 차가 다니면서 첫 번째 집을 바뀌었다. 날이 어두워지면 비렁 길에서 기다리던 어머니는 이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쇠하였다. 나 또한 여기를 얼마나 더 지나갈 수 있을지 모른다. 고향을 떠난 후 일 년에 두세 번 오던 길을 지금은 한 달에 두 번씩이나 오고 있다. 매번 차로 쌩하게 지나가던 길. 오늘은 비를 맞으며 느리게 걷는다.
내 어린 날이 그때의 보폭으로 나를 따라 걷는다. 길게만 느껴졌던 거리는 고작 삼백 미터도 되지 않는다. 이제는 길도 변했고, 주위 환경도 변했다. 길의 끝에 있던 커다란 고구마 공장은 세월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날아가는 골프공을 잡으려는 초록색 그물망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변하지 않고 길바닥에 굳건히 묻혀있는 바위. 비 오는 날은 비의 양보다 더 많은 물이 바위를 타고 흐른다. 바위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나의 두 눈이 바위를 따라 산을 오르고 있다. 남해에서 가장 높은 망운산이 희뿌연 안개를 뒤집어쓰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어머니를 조금 더 오랫동안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며, 그 시간만큼 이 길도 더 밟아 보기를 희망한다.
약력
계간 「문학나무」 수필 등단(2020) 한국수필문학가협회, 문학나무숲, 문학동인 글풀 회원
공저 『강물로 가는 시간』 『인연을 깁다』 『달팽이 뿔 날개가 되다』 외 다수
現, 학교도서관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