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문학의 후반기- 문화대혁명과 저항문학
김학철은 후반기, 그의 나이 41세로 넘어들자 제2기 비극적 운명에 또 다시 맞닥뜨린다. 1954년 <해란강아 말하라>가 문제가 되어 57년 ‘반동분자로 숙청당해 24년 동안 강제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61년에는 북경 소련대사관 진입시도를 하는 등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고난의 행군이 다시 시작된다. 결정적인 것은 문화대혁명의 모순을 예고하는 <20세기의 신화>로 67년 반동 반혁명분자로 다시 몰려서 10년 형을 받는다. 더 무서운 것은 소설가로서 생명인 글을 쓸 수 없으며, 발표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반동분자’ 집행직전에 <고민>(단편소설집), <번영>(중편소설) 등을 출판했을 뿐이다. 이러한 극한상황 속에서도 그는 자기의 창작 글이 아닌 다른 사람의 번역을 하면서 문학적 정신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평소에 흠모하던 魯迅의 <아Q정전>, 周立巴의 <산촌의 변혁>(상,하) 등의 소설을 번역하기도 하는 등 야24년의 공백을 메우려고 노력한다. 그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독재적 사회주의에는 반대했다. 진정한 사회주의는 인간적이며 민주적 사회주의이다. 서로를 견제하며 비판 감독을 할 수 있는 세력이 있어야 한다. 사회의 발전은 인위적 요소가 아니라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일생을 허위와 신격화를 반대해 싸웠다. 마오쩌둥의 개인 숭배도 포함해서. 사회주의는 종국적으로 실현될 것이다. 맑스와 엥겔스의 사상은 존경을 받아야 한다. 그러할 힘도 권위도 있다. 하지만 20세기에서 서둘러 최종 완성하려 했던 것이 문제로 됐다. 사회의 발전은 인위적인 요소가 아니라 법칙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다. 일당 독재도 문제가 있다. 서로 견제하고 감독할 세력이 있어야 한다.”
평소 사회주의자로서 그의 철학적 신념과 문학적 사상은 위와 같이 죽음을 앞두고 다시 한번 유언처럼 그의 외아들 김해양에게 재확인 시켰다. 그의 작품은 고골리의 <검찰관>고리끼의 <어머니>와 같이 사회적 모순을 고발한 문학성이며, 마르크스적 문학정신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7월에 <20세기 신화> 원고가 홍위병들에게 발각되어 몰수된다. 그들은 가택수사 끝에 이 원고를 찾아내어 고발한 것이다. 이듬해 그의 나이 51세부터 다시 10년간 秋梨沟 감옥에 갇히게 된다. 80년 12월, 25년만에 정치적 복권이 되었다. 65세의 나이로 창작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85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부주석으로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중국작가협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
그의 인생 전반기는 항일무장 투쟁혁명가로서 조선의용군 군인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후반기와 종반기는 철저한 사회주의자 문학가로서의 삶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의 철학사상을 문학정신으로 실현하면서 일당독재와 맞섰다. 평생을 저항문학가로서 양심적 지조를 지켜왔다. 그러면서도 냉전적 사고가 아니라 낭만적 사회주의 문학가로서 살아왔다. 한반도와 아시아를 통틀어 이런 지조와 양심을 지켜낸 문학가는 많지 않다.
김관웅은 ‘김학철의 20세기 신화의 국제정치 배경’ 논문에서 당시 지하활동을 했던 양심적인 대륙 문학가들을 포함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대개의 작가들이 엄혹한 문화대혁명 시기에 침묵을 하고 있거나 외면을 해왔다. 일부 양심적인 문인들이 지하에서 문필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으나 김학철과 같이 정면으로 일당 독재를 비판하고 나선 작가는 누구도 없었다. 김학철은 이 시대 가장 철저한 시대정신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당시 대륙에서 어떤 문학가도 김학철과 같이 정면에서 역사와 시대적 정의 앞에 용감하게 도전했던 문인들은 거의 없었다.”
<20세기의 산화>는 김학철의 인생과 인간을 상징하는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소설이 그에게 약24년간의 문학적 사망과 인생의 큰 공백을 만들게 된 것이다. 또한 오늘날의 ‘김학철’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