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 사유상(半跏 思惟像)과 조선 백자(白磁)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얼마 전, 국립중앙박물관의 ‘사유(思惟))의 방’을 갔다. 이 불상 둘은 7세기 무렵의 작품으로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상징한다. 그리고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얹고, 오른손을 살짝 뺨에 댄 채 깊은 생각에 잠긴 반가 사유상((半跏 思惟像)으로 삶에 대한 깊은 고민과 깨달음을 느끼게 한다.
이번 전시 반가사유상 2점(국보 제78호·83호)은 한국을 대표하는 미소(微笑)가 되었다고 평을 받았다. 이 작품은 서양의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보다 더 값진 것으로 평가하며, 사유의 방을 만든 작가가 깊은 의미를 부여하여 설치한 작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인류 문화유산으로서 반가사유상이 지닌 보편적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이 시절 금동불상은 15~20cm로 작은데, 한반도의 금동불상은 80~90cm로 큰 편이다. 우리의 주조기술이 세계 최고였음이 입증되었고, 조형적으로도 완벽하다. 사유에 잠긴 듯한 얼굴, 가늘고 기다란 눈과 눈썹, 유려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오른손 손가락, 오른발 발목을 팽팽하게 감고 있는 법의(法衣)의 주름, 잔뜩 힘이 들어간 오른발 엄지발가락에서 섬세한 표현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입가에 미소가 매우 아름답고 미학적, 철학적 가치가 뛰어났다.
이어서 ‘장생 백자(白磁)에 펼친 장수기원’ 전시회를 갔다. 고려 시절에 유행한 청자와 상감 청자에 이어 조선 초기 분청사기가 유행했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1930년대 분장회청사기(粉粧恢靑沙器)라고 이름 지으면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분청사기는 세종 때 놀라운 발전을 이루고 세조 때 전성기를 맞이했다. 전국 각지의 가마에서 제작된 분청사기와 경기도 광주, 경상도 고령과 상주 등 일부 지역에서 만든 백자가 중앙관청으로 보내졌다.
조선백자는 명나라와 교류하면서 더욱 발전하고 유행했다. 세종 때 임금이 사용하는 그릇이 되었고, 15세기 후반부터 백자가 조선의 최고 도자기가 되었다. 백자는 순백의 흙으로 그릇을 만들어 유약을 입힌 다음 1300도가 넘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도자기이다. 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최순우는 ‘나는 믿고 싶다. 도공들은 만드는 즐거움에 살고 있다고, 무어라고 조리 있게 설명할 수는 없어도 그릇을 빚어내는 즐거움이 바로 그 아름다움을 보는 마음이라고’ 도공들의 마음을 헤아렸다.
고려청자보다 더 우수한 기술로 제작된 백자는 조선 시대에 널리 쓰였다. 조선백자는 절제미와 우아한 품격을 갖춘 뛰어난 품질의 도자기이다. 19세기에 화려하게 꽃피운 백자 문화 이면에는 조선 왕조 말기의 불안한 정세와 위기감에 평안하게 행복을 누리면서, 오래 살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길상(吉祥)무늬를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이번 전시회의 사유의 방을 통하여 세계 70여 개의 반가 사유상 중 우리나라가 소유한 불상이 최고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분청사기와 조선백자를 보면서 고려청자보다 더 깊고 화려한 도자기임을 입증되었다. 그런데 백자를 만들던 도공들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의 도자기 발전을 돕고, 일본이 우리 도공들의 기술을 활용하여 서양으로 대량 수출한 점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며, 우리 모두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강화하여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화국가를 유지하도록 함께 노력하자. P.S. 이 원고는 3000자이지만 지면 관계상 1700자로 올림. /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