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혼돈의 계절 =한 번도 본적이 없었지만 그저 운이 좋아서 자리를 꿰차고, 자리가 사람을 만들어서 큰 권력을 틀어쥔 것이라 판단했다.
헌데 그게 아니다. 큰 기세가 느껴지는 박영달이다. 그가 집무실을 빠져나가자 적막이 감돈다. 집무실 안으로는 다 들어서지도 못했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는 김수곤을 흘끔 쳐다보고 나서는 두어마디 던져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빈방이 되어버린 박영달의 집무실에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게 되었는데 그런 김수곤을 뒤늦게 발견한 비서가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눈을 부라려 닦달하여 내몰고 나와서는 비서실 한쪽 구석에 우두커니 세워놓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처구니가 없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취급하는 사무실 사람들이다.
경사가 났다며 고향사람들이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해주었다. 하인처럼 취급하던 아버지와 가족들을 이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이제 김수곤은 수많은 사람들이 축하해주고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한다. 그런 자신이 이런 대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황스럽고 자존심이 상하는 터라 기분이 몹시 언짢다. 이게 뭔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럴 일 만은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자신을 우습게 보는 이곳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대단한 곳이라는 뜻이다. 박영달이 더 크게 보이고 존경스럽다. 바람처럼 사라진 박영달의 등판과 기세가 무척이나 넓고 높다.
“미안하지만 물 한 잔 마실 수 있을까요?”
김수곤의 신상을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어디를 가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는 요즘이지만 알아주는 것은 고사하고 관심조차 없다. 마치 투명인간이나 다름없는 취급이다. 그렇지만 기가 꺾여서는 안 된다. 내가 누군데 하고 애써 자신을 스스로 높여 보지만 그럴수록 움츠러들고 작아지는 김수곤이었다. 견디다 못해서 얼굴이라도 마주쳤던 비서에게 다가가 말을 붙여 보느라 한 말이다. 그런데 고개를 거만스럽게 쳐들어서 눈을 치켜떠서 쏘아보고는 대답대신 윽박질이다.
“어떻게 왔죠?”
무척이나 퉁명스럽고 야멸친 말투다. 뭔가 실수를 했음이 금세 느껴지는 반응이다. 사실 물을 얻어 마시려고 한 말은 아니다. 첫술에 배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박영달에게 홀대를 받기는 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눈에 들어서 신임을 얻으려면, 문턱이 닿도록 이곳을 기웃거려야만 한다.
하찮기 그지없는 박준영에게 고개를 조아려서 얻은 기회라서 이번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텃새를 부리고 있는 비서부터 잘 사귀어야 한다. 그러려면 가랑이 사이라도 기어들어야 한다.
“보좌관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요번에…….”
“제가 묻는 것은 그게 아니고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겁니다.”
“…….”
김수곤은 대답이 궁색하다. 박준영처럼 삼촌이 아니다. 그렇다고 친척이나 인척도 아니다. 단지, 어렴풋이 아는 고향사람일 뿐이다. 그렇다고 곧이곧대로 연줄을 대려 왔노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비서가 묻는 말뜻을 모르지 않는다.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어서 얼버무리느라 해보는 말이었다. 헌데 그것조차도 봐주지 않는 비서라서 더 이상 말문이 막혀버린 김수곤이다.
“보좌관님, 배웅 잘 하셨어요?”
배웅을 마친 박준영이 비서실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딱딱한 표정으로 벌레를 쳐다보듯 쏘아보던 비서의 눈빛이 금세 달라졌다. 먼 곳에 가서 큰 고생을 하고 돌아온 사람처럼 호들갑스런 눈빛으로 박준영을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신혜경 비서 누님! 그런데 날로 예뻐지네요. 혹시?”
박준영은 응접소파에 몸을 부려 철퍼덕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익숙한 몸짓이다. 그런 박준영과 달리 김수곤은 비서의 면박으로 무색해져서 소파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수곤아 이쪽으로 와서 앉아.”
자신보다도 한참이나 나이가 많아 보이는 비서에게 말을 건네 놓고도 건성으로 대하며 친구를 챙겨서 소파에 앉히는 박준영이다. 마치 자신의 사무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그런데도 김수곤에게 보였던 좀 전의 모습이 온 데 간 데 없어진 비서다. 분명 박준영의 행동이 무례한 것인데도 탓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박준영의 농담을 익숙하게 받아 넘겼다.
“정말 예뻐졌어? 이제 시집가도 되겠어?”
사이좋은 오누이사이 같다. 아마도 이곳을 제집 드나들 듯 해서인지는 몰라도 대화에 격의가 없으며 따뜻한 온기가 흐른다. - 계 속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