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
박영달에게 다녀온 후 김수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 매사에 자신감이 넘쳐흐르고 패기만만한 사람이라서 다소 건방져 보이기까지 했다. 더더구나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나서는 큰 권력이라도 틀어쥔 것처럼 안하무인의 태도를 보이기도 했었다.
그랬던 김수곤이 요즘 부쩍 달라져 있는 터라 단짝 친구인 정병기가 시간을 내서 찾아왔다. 정병기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를 잘 알 안다. 그렇지만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반가운 단짝 친구를 보고도 본체만체하고 있었다. 벌써 10여 분째 깊은 생각에 빠져있다. 바로 옆에서 그런 그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꺼내 놓는 말이었다.
“뭘 그리 생각하니?”
비록 단짝 친구지만 정병기는 늘 부럽기 그지없었다. 물론 권세가 대단하고 유복한 그의 배경이 가장 부럽다. 정병기는 내로라하는 자신과 견주어도 절대로 뒤지지 않는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학업 성적으로만 출중한 자신과 달리 다양한 분야에서 교양과 지식을 두루 갖췄다.
특히 김수곤으로서는 도저히 흉내조차도 낼 수가 없는 피아노 연주 실력은 전문가 수준이다. 죽기 살기로 성공과 출세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자신과 달리 인생을 제대로 즐기는 정병기라서 말할 수 없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생긴다.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겉으로야 아무것도 아닌 척 깔아 뭉개보지만, 김수곤은 자신도 모르게 열등의식이 느껴지고 있다. 그러는 김수곤을 잘 아는 정병기라서 늘 안쓰럽고 안타깝다.
“…….”
한참을 말없이 지켜보다가 겨우 말을 붙였다. 그런데도 대답은 고사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골똘해 하는 김수곤이라서 훼방꾼처럼 느껴지는 터라 무색해진 정병기다. 친구의 심상찮은 태도에 더 이상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병기였다.
“인간 생태계에 대해 생각해봤어?”
마치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는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자신을 보러 온 친구를 소홀히 대한 것이 미안해서 나온 의미 없는 질문이라 여긴 정병기다.
“인간생태계? 맞아 니가 내 밥이지!”
정병기의 대답은 농담일 뿐이었다. 농담처럼 들렸기에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데 김수곤이 정색을 하더니 이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렇지 내가 니 밥이지. 그래 그거야. 아무리 용을 써도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는 먹이사슬이 있어.”
“무슨 대단한 생각을 하는 줄 알았네. 설마, 누구나 알고 있는 약육강식의 법칙을 이제야 알았다는 것은 아니겠고.”
김수곤이 점점 더 진지해지며 무엇이 떠오르는지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난번 고향 친구를 졸라, 어디를 다녀오고부터 심각해진 친구라서 그곳에서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 짐작되는 정병기였다.
“거기 가서 무슨 일 있었니?”
“아니.”
“그런데 왜 이렇게 심각해진 거야?”
김수곤은 정병기와는 너무 다른 환경의 사람이다.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촌놈이지만 개천에서 난 용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수재 집단인 한국법대에서도 출중했다. 그는 자신의 출중함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정교사 생활로, 스스로 생계와 학비를 해결해 가면서도 사법고시를 단번에 합격한 수재 중에서도 수재였다.
어렸을 때부터 궁핍함과 설움을 숙명처럼 지니고 살지만, 한편으로는 그는 타고난 영특함으로 사람들의 칭송과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남달리 일찍 철이 든 김수곤은 어지간한 어른보다도 처신하는 것이 나았다. 항상 칭송과 찬사가 뒤따라서인지, 그는 자존심이 무척 강하며 남에게 고개를 숙일 줄 모른다. 그런 그가 권부를 다녀온 뒤로 그답지 않은 모습으로 며칠째 고민하고 있었다.
“병기야! 내가 합격하고 시골에 갔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했나?”
“동네 사람들이 잔치해준 것? 했잖아.”
정병기도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에겐 그저 평범한 일일 뿐이다. 김수곤처럼 개천에서 용 난 것이 아니다. 아버지는 고위 법관을 지내고 나서 지금은, 원로 법조인으로 법조계 신망이 대단하다. 큰형은 행정고시에 합격했으며, 작은형과 누나도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현직 판사와 검사로 근무하고 있다.
그의 집안에서는 정병기의 사법고시 합격이, 그저 으레 있는 일일 뿐이었다. 그에 비애 김수곤의 고시합격은 동네 사람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그런데도 온 동네가 나서서 잔치를 열었다 한다. 정병기는 그런 말을 전해 듣고는 무척이나 의아했었다.
“내가 그때 군수가 왔다는 말도 했나?”
“그렇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만……. 정말로 왔어? 와서 뭐라 했는데?”
“별말은 없었고 군내에서는 나밖에 없데. 그래서 경사 났다나 뭐라나 하더라고.”
“그런데 군수가 인사를 온 것하고 먹이사슬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 거야?”
“글쎄. 하지만 연관이 분명히 있어.”
김수곤은 정병기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표정이 점점 더 진지해지며 눈빛의 날카로움이 강렬한 광선처럼 뿜어져 나왔다. 평소에도 예사 사람의 눈빛은 아니었다. 총기가 빛나고 힘이 들어가 있는 터라 웬만한 사람은 시선을 마주쳐서 얘기하기가 거북할 정도로 매섭다.
그런 그가 맘먹고 내뿜는 눈빛이라 정병기는 광기처럼 느껴졌다. 강한 그의 눈빛을, 처음으로 봤던 김수곤의 모습을 떠올려 놓았다. 그날 아침 부는 세찬 바람이, 쏟아져 내렸던 간밤의 하얀 눈을 빙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빙판은 번들거리다 못해 거울이 되어 얼굴이 비칠 정도였다. 그야말로 강추위가 맹위를 떨치는 날이었다.
합격자 명단이 게시된 발표장은 더했다. 산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고, 제자리에 잠시만 서 있어도 신발 바닥이 쩍쩍 달라붙었다. 추위는 옷을 세 겹이나 껴입고 두꺼운 외투까지 걸쳤지만, 아버지가 내준 승용차 안에서 한 발짝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코앞이 합격자 명단이 붙어있는 게시판이었지만 직접 확인하지 못하고 운전기사를 통해 확인하게 했다. 물론, 이미 합격의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합격의 기쁨을 만끽해 보려고 발표장을 찾았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