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 소설- 혼돈의 계절
그날 김수곤을 처음 봤다. 두꺼운 외투는 고사하고 낡아서 찢어질 것같이 얇은 교복 하나만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츠리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뼛속을 파고드는 칼바람의 추위에도 맨주먹을 불끈 쥐고 합격자 명단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합격의 기쁨에 들뜬 또래의 열아홉 살 고등학생이 아니었다. 합격의 감격에 세상을 다 얻은 양, 소리를 지르며 기쁨을 만끽하는 보통의 학생과 김수곤은 너무 달랐다.
그는 강추위에도 아무 흐트러짐이 없었다. 마치 장엄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꼿꼿하게 합격자 명단만을 바라보다가, 묵직한 걸음으로 발표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병기는 작은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범상치 않은 김수곤의 눈빛을 보았다. 너무 충격적인 모습이라서 생생하게 기억하게 만든 그가, 수석 합격자인 김수곤이었다.
그런 그가 며칠 전부터 심란해하고 있었다. 정병기는 큰일이라도 있나 싶어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달려왔다. 도착한 지 거반 한 시간이 지났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만 되풀이했다. 걱정되어 찾아온 친구가 옆에 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있는 그지만, 짐작되고 이해되는 정병기라서, 안타깝다. 이런 때는 혼자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돌아가려 일어서려다가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군수하고 먹이사슬하고의 연관성은 모르겠고 아직 연수원에 입소도 안 했는데 뭐가 그리 급해서……. 그렇고 그런 친구라며, 아쉬운 소리까지 해가며 뭐 하러 갔어?”
권력에 줄을 대려는 김수곤의 사정과 계산을 알 리가 없다. 개천에서 난 용이 된 김수곤이니, 탄탄대로가 놓인 앞길이다. 남들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는 출발선이므로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다, 누가 뭐래도 이젠 자기 자신이 어찌하느냐에 달렸다.
“그렇지 너 같은 사람은 나를 이해 못 하지!”
김수곤은 농담을 정색으로 받아치고 있었다. 정병기가 농담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평소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터라, 정병기는 의도를 내보이려고 또다시 농담을 건네고 있었다.
김수곤은 여전히 그 농담을 정색으로 반응하며 목청을 높였다. 뜻밖의 반응이다. 정병기의 의도를 모를 리 없는 김수곤이지만, 평소와 달랐다. 혹시, 오해가 생겨 그러는 것이라 여겨지는 터라, 또다시 농담으로 대꾸하는 병기였다.
“너 며칠 동안 웅크리고 있더니 개똥철학을 하는구나? 허허허…….”
김수곤은 농담 따위가 귀찮다는 듯이 표정이 더 심각해지며 목소리가 날카로워져서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갔다.
“너! 힘없는 설움 당해본 적 있어?”
“왜 없어? 나도 많지.”
정병기는 점점 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온실 속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정병기 같은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런 그라서 말이야 알아듣지만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 턱이 없어서 일부러 농담으로 받아들이며 대꾸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힘센 놈에게 맞아본 적 있느냐고 묻는 거 아냐!”
김수곤도 농담이라는 것을 안다. 김수곤의 아버지는 지금도, 참기 어려운 굴욕과 설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뿐만이 아니다. 자신도 지금, 아버지의 아픔을 이어받아 살고 있다. 바로 그 아픈 상처가 농담하는 정병기를 공격하고 있었다.
“글쎄?”
질문에 대답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위로하러 찾아왔지만, 김수곤의 골똘한 집중에 위로할 방도가 없다.
김수곤을 만나기로 한 날이다. 윤승희는 평소에 입지 않던 치마를 입고, 입술에 빨간색 립스틱도 바르고, 거울 앞에 앉아 단장에 열중이었다. 그녀 옆에 서 있는 엄마도 덩달아 들떠서 딸이 더 예뻐 보이게 하려는 욕심으로 이것저것 간섭이 많다. 윤승희와 김수곤은 동갑내기이며 학년도 같았다.
그런데도 윤승희는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김수곤에게 과외를 받아 대학에 진학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법 큰 사업을 하는 터라 김수곤의 고향에서만큼은 큰 부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다.
그는 돈이 없어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던 김수곤을 자신의 집에 거두어서 진학을 시켰으며 여러 계산으로 동갑내기인 딸의 공부도 맡겼다. 그뿐만 아니라 김수곤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공을 들여왔다.
“승희 학생! 전화 왔어.”
가정부가 아래층에서 큰 소리로 불렀다. 두 모녀가 외출 준비에 집중하느라 함께 연결된 전화벨 소리조차 듣지 못해서다.
“이따 만날 건데 웬일이에요?”
김수곤인 줄 알고 받은 전화였다. 그런데 수화기 안에서 예상치 않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승희 아버지는 고향 근처 도시에서 터를 잡아 사업하고 있었다. 물론 서울에도 살 집을 장만해 놓고 가정부를 두어 살림을 한다.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마련한 살림 가옥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한국법대에 수석으로 합격을 하자 김수곤의 학교 근처에다가 서둘러서 사들였던 집이다. 그를 위해 마련한 집이나 다름이 없는 만큼 당연히 그가 기거해 줄 것이라 여기고 집을 샀다. 하지만 완강하게 거절하는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나다.”
“네, 아빠?”
“만나기로 한 날이 오늘이지?”
“응! 조금 있다 나가려는 참인데.”
“이쁘게 했냐?”
“엄마가 해주고 있어요.”
“뭐야? 엄마가 한다고!”
“엄마가 저보다는 화장 솜씨가 낫잖아요.”
“엄마 좀 바꿔봐.”
남편이 자신의 화장 솜씨를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아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마음까지는 그렇지 않았다. 딸의 데이트에 덩달아 들떠 화장 실력을 발휘해보지만 만족스럽지 않은 터라 남편이 나서 간섭 해주는 것이 오히려 기쁜 엄마였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