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계절"
한데 아버지의 충고대로 돈을 들여놓으니 승희는 무척이나 만족스럽고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아주머니 저예요. 부탁드릴게요.”
대문 앞에 대기 시켜놓은 대절 택시를 보내려 전화를 걸었다. 물론 약속장소에서 만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굳이 아버지가 사소한 것까지도 고집하는 터라 김수곤을 태워 와, 함께 약속장소로 가려는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다.
김수곤 주인집 아주머니는 승희를 잘 알고 있었다. 지방에 사는 부잣집 딸이라는 것을 안다. 매이 퀸으로 뽑혀서 유명하다는 것과 매스컴의 관심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냥 수줍어하며 겸손할 뿐인 승희라서 주인집 아주머니는 좋아하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바꿔줄게.”
그런데 김수곤에게 전화를 바꾸러 간 지 오 분도 더 지났다. 가타부타 말이 없어 전화를 끊으려는 참이었다.
“방에 없는데…….”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놓쳐버린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들려왔다. 김수곤의 방은 안방의 맞은편에 있다. 안방에서는 앉아서도 드나드는 것을 훤히 알 수가 있다. 더더구나 가정교사의 입장이라서 허락을 받고 외출했다. 김수곤은 항상 그래왔었다. 그런데 나가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오래되었나요?”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뭐라고 전해줄까?”
미안해하는 말투가 분명했다. 보이지 않지만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는 말투이고 내용이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린다.
“아니예요. 이따가 만나기로 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조금 전까지 있었는데……. 뭐라고 전해줄까?”
미안해하는 말투가 분명했다. 보이지 않지만 어떤 상황인지 짐작이 되는 말투이고 내용이다.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니예요. 이따가 만나기로 했어요. 안녕히 계세요.”
수치심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도 의식할 겨를이 없어서 서둘러 전화를 끊고 보는 승희다. 왠지 알 수 없는 설움이 몰려든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도 그랬다. 수곤의 방에서 온종일 기다렸다. 그것도 미리 약속을 정하고 간 기다림이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허탕을 쳤다.
그리고 전화를 기다렸다.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아버지의 강고한 주문으로 자존심을 굽혀, 여러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김수곤은 그때마다 외출하고 없었다. 무려 두 달 만에 이루어진 통화였다. 바쁘다는 그에게 생떼나 다름없는 고집을 부려서, 겨우 얻어 낸 약속이었다.
김수곤의 태도가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서 그의 처지를 이해하려 해보지만 씁쓸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승희는 아버지를 떼어놓고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죽어버리고 싶었다. 자존심으로 상처가 깊었다.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심정이었다. 참고 또 참으며 이해하려 애쓰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엄마의 표정도 일그러졌다. 들뜬 기운이 금세 사라지고 실망감이 가득해지는 표정이다. 가슴이 찢어지고 있었다.
“벌써 약속 장소로 갔다나 봐.”
혹시나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실망하는 엄마를 위로하려고 약속장소에 왔다. 아늑한 공간에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넓고 안락한 공간이다. 간간이 놓여있는 화분과 세련된 실내장식이 고급스럽다. 종업원의 단정한 용모와 세련된 태도가 돋보이고 있었다. 세련되고 익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매우 낯설었다. 그들의 모습과 행동에 열등감이 느껴졌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서 낯선 풍경에 주눅이 들어 그랬다.
승희 아버지가 이곳으로 약속을 정했었다. 약속장소를 시끄러운 음악다방으로 정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직접 비서를 보내 가장 좋은 자리를 잡아놓기까지 했다.
“예약하셨습니까? 손님.”
“예.”
“성함이 혹시 윤승희씬가요?”
종업원에게 안내되어 간 좌석은 아늑했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멀리에 있는 남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장식품들이 절묘하게 놓여 은밀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레스토랑 홀과 별도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야말로 식사하고 데이트를 즐기기에는 좋은 자리였다. 평소의 윤승희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격식이나 분위기를 따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심한 정성을 쏟아붓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알기에, 승희는 죽을힘을 다해 마음을 다스려본다. 잔잔히 흐르는 음악을 위안 삼아 모멸감을 참아내고 있었다.
정병기와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렇기에 돌아가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검토할 일들이 산더미였다. 할 일들을 노트에 정리해보자. 내일은 반드시 박영달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굴을 익힌 신혜경과 통화를 해보려 백방으로 수소문했다. 겨우 얻어낸 통화에서 봉변을 당했다. 박준영의 도움 없이는 먼발치의 박영달도 구경조차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선배인 신혜경이 힘이 되어 줄 것이라는 자신의 판단이 탓이 되는 김수곤이다. 박준영의 존재가 너무나 커 보인다.
박준영에게 전화했다. 자신의 전화를 피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물러설 수가 없는 일이었다. 또다시 전화하려고 문을 나서는데 윤승희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그런 하찮은 문제로 허비할 시간이 없다. 주인아주머니의 보챔을 무시했다. 그리고 골목 어귀의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가 전화를 거는 것이다.
“여보세요. 거기 준영이네 집이죠?”
“맞는데 예.”
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앳된 음성의 가정부가 전화를 받는 터라 자신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투가 튀어나온 김수곤이다.
“준영이 좀 바꿔줘요!”
“누구신데 예?”
“김수곤이라고 하면 압니다.”
“잠깐만 기다리세 예.”
김수곤은 가정부가 대답하는 사이에 준비된 말을 기억해 보았다. 비록 배경이야 비교할 수 없지만, 워낙 똑똑한 자신이라서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 박준영이라는 것을 안다. 자존심을 생각해서 준비해 놓은 말이 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