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안 계시는데 예.”
귀를 수화기에 바짝 대고 기다리는데 좀 전의 가정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다시 전화통화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따질 수는 없었다. 김수곤은 맥없이 수화기를 내려놓고 한숨을 푹 내쉬다가 마음을 다잡았다.
예전부터 김재옥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박영달보다도 권력이 훨씬 더 크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김희성의 큰아버지이기도 한 김재옥은 대통령에 버금갈 정도의 힘으로 조그마한 산골동네에 권세가들이 득실거리게 했다. 박영달도 김재옥의 도움으로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고향이 같다는 김재옥과의 인연이 없었다면 평범한 농사꾼으로 살아갈 사람이라 들었는데 대단한 권세가가 되어있는 요즘이다.
김수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똑똑한 사람이며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다. 선배들이 이미 자리를 닦아놓은 권세의 사단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 김수곤은 그들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데 있어서 첫 번째 관문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친구인 김수곤이라는 사람입니다. 최정환 씨 좀 바꿔주세요.”
김수곤의 전화에 흥분부터 쏟아내는 최정환이었다.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비록 동창생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잘난 수곤이라 대놓고 대하기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여태껏 한 번도 서로 만나거나 연락을 주고받지도 않는 사이였다. 그런 전화라서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여서 흥분부터 하고 있었다.
“아! 나야 나 최정환! 웬일로……?”
“그냥 전화 한 번 해봤다. 잘 지내나?”
“니 소식 신문에서 봤다. 영감님이 손수 전화도 주시고……. 너무 영광이다.”
최정환은 김수곤과 달리 시원찮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비록 여러 가지 면에서 그저 그런 사람이지만, 붙임성이 좋고, 털털하며 인정이 많아서 친구들 사이에서만큼은 인기가 좋다. 그의 주변에는 친구들이 끊이지 않으며 친구들 간에 소식통 노릇을 한다고 들었다. 최정환은 중학교만 어렵사리 졸업하여 상경하여 돈벌이하느라 해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최정환 큰돈이야 벌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으로 된 가게를 갖고 제법 자리를 잡고 있었다. 자리를 일찍 잡은 그라서, 사람 좋은 그라서, 최정환의 가게는 동창생들이 늘 북적거렸다. 그의 가게는 동창생들이 모이고, 소문과 소식이 모이는 사랑방이었다. 최정환의 가게를 가면 만나고 싶은 친구들을 만날 수가 있고 소꿉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수가 있었다.
“수곤이 니가 그리될 줄 알았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 때부터 알아본다고 했잖아. 어렸을 때부터 우리하고는 매우 달랐어. 축하한다. 정말 축하해.”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고향 사람들이 돼지를 잡아서 축하 잔치를 해주기는 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배 아파하는 세상인심을 봤다. 좀 전의 박준영도 그런 심보의 발로라 생각하던 참이다. 하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최정환의 반응이라서 찜찜한 기분이 약간 풀리는 느낌이었다.
“야, 그러지 말고 우리 가게에 놀러 와. 여기 오면 우리 동창들을 다 만날 수 있어. 서울뿐만 아니라 제주도에 있는 놈들까지 모두 연락돼. 그렇지 않아도 소식 듣고 축하해준다며, 모이기로 했었거든. 그런데 너에게 연락을 할 수 있어야지. 말로만 열 번도 더 모였다! 이제 정말 모일 수 있겠네……. 그렇지. 언제 올래? 내가 당장 연락을 해서 다 모아 놓을 테니까. 오기만 해. 아무튼 너무…….”
최정환 흥분된 상태로 자신의 말만 계속하고 있었다. 김수곤은 언제 말을 끝낼지 모를 수다 같은 얘기를 들어 줄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그럼 희성이도 연락되니?”
최정환은 김희성을 모른다. 어렸을 때인 초등학교 이학년 여름에 서울로 이사를 한 김희성을 알기가 쉽지 않다.
“너, 김희성 몰라? 이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같던 애 있잖아. 우리 동네 살았고. 김재옥 씨 조카 말이야.”
최정환은 김재옥 조카라는 말에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유명한 김재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최정환 자신이야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고향 사람들에게는 많은 영향을 끼치고 힘이 되는 사람이라서 인기가 좋고 따르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래 기억이 난다.”
“혹시?”
“걔 찾으려고 전화했구나. 그럼 김재옥 의원 사무실에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
최정환의 말투 속에서, 안부 전화나 할 사람이 아니라는 실망이 묻어나오자 김수곤은 슬쩍 말을 돌려 하는 말이다.
“아니야, 특별히 찾는 이유는 없어. 친구들 연락이 다 된다고 하니까 한 번 해본 말이야. 그건 그렇고 네 가게는 어디야?”
희성이의 소식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계산으로 건 전화였다. 웬만한 친구들의 근황에 관해 꿰뚫고 있다고 들었으나 헛발질이었다. 행동 하나라도, 얘기 한마디라도,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전화를 끊었지만, 소득 없는 행동이라서 스스로가 탓 되었다. 씁쓸한 기분으로 방에 들어서자 고민 끝에 구한 금서가 생각났다.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호텔에서 애타게 기다릴 윤승희를 까맣게 잊고서,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
“늦으시나 보네요?”
“…….”
약속한 시각이 한참이나 지났다. 그렇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느라 주문이 늦어져서 건네는 말이라 판단되지만 부끄럽다. 늦으면, 늦는다고 못 올 형편이면, 못 온다고 전화라도 해주어야 옳다. 하지만 김수곤은 그럴 기미조차도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시꺼멓게 타고 있었다. 윤승희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종업원의 한마디에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대꾸를 제대로 못 하고 애써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전화해 보시겠습니까?”
종업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물론 호의를 베푸느라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지만 종업원의 말투가 마치 빈정거리는 것처럼 들리고 있었다.
“알아서 할 거예요.”
괜한 참견이 짜증스럽다. 마음 같아서는 톡 쏘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부끄러움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진땀이 날 지경인지라 기어들어 가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반항을 섞어 대답했다.
이젠, 어둠이 창밖에 불량스러운 모양으로 자리를 잡았다.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의 불빛이 유난스럽다. 식사를 마치고 함께 거닐려 했던 숲길이 있었다. 까만 어둠이, 숲길을 감쪽같이 집어삼키고 시치미를 뗀다. 김수곤의 시원찮은 반응을 예상 못 한 일은 아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두 시간을 기다렸다. 애초부터 이렇게 질긴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김수곤의 어이없는 행동에 오기가 생겨 기다리기 시작했지만 이리 형편없는 모습이 되어 주변의 눈치를 살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이젠,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지나치다가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눈초리가 제자리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쳐다보고 수군거린다. 종업원들도 오며 가며 훔치듯 쳐다보고 속닥거린다.
대부분의 대학이 오월에 축제를 개최한다. 다양한 행사로 낭만을 즐기고 젊음을 누린다. 그중에서도 오월의 여왕을 뽑는 일은 인기가 가장 많아서 절정이 되는 행사였다. 대학에 재학하고 있는 학생 중에서 지성과 미모의 여성이라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도전해보는 행사였다.
그 여왕을 메이퀸이라 부른다. 진짜 여왕이라도 되는 양, 왕관을 쓰고 대관식도 연다. 큰 영광으로 여긴다. 화제가 되어 유명해지기도 하며 좋은 혼처로의 결혼을 담보하기도 했다. 다른 미인대회와 달리 지성을 따져서 미모를 가리는 터라 시민들의 관심이 무척 많다. 언론들도 귀중한 화면과 지면을 할애하여 크게 보도하고 법석을 떤다. 시민들에게도 신상과 얼굴이 공개되어 알려졌다.
윤승희는 메이퀸이 되어 유명해졌다. 여러 대학에서 축제를 여는 만큼, 선출되는 메이퀸도 여럿이다. 그렇다고 모두 알려지고 화제가 되지는 않는다. 출중한 미모나 재능을 지녔거나 특이한 사연을 가졌을 때, 언론이 주목하고 사람들에게 인기가 생긴다. 어느 해보다도 어느 대학의 메이퀸보다도 월등하다고 세간의 사람들이 평가한 윤승희다. 지성미와 관능미를 동시에 지녔다며 언론이 법석을 떨었다.
미녀는 ‘속살, 이, 손이 희어야 한다는 삼백(三白), 입술, 유두, 음부가 붉어야 한다는 삼적(三赤), 눈썹, 머리카락, 음모가 검어야 한다는 삼흑(三黑)’을 갖춰야 하는데 그게 윤승희를 두고 하는 얘기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얗고 길게 뻗은 목선에 박힌 까만 점 하나를 두고도 말이 많았다.
사슴이라는 시를 갖다 붙여서 슬픔을 얘기하기도 하고 우아함의 극치라 말하기도 하며 관능묘사의 백미라 하기도 했다. 해맑은 눈빛을 두고도 희로애락이 모두 들어있다며 말하기도 했고 정신을 꾀어서 혼미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요염한 눈빛이라 탓하기도 했다. 또 늘씬하게 뻗은 다리와 잘록한 허리가 남자들에게 보호 본능을 일으켜서 머슴을 자처하게 강요한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이렇듯 너무나 출중한 미모에 매스컴과 시민들이 흥분했다. 바깥에 나다니기가 불편할 정도였다. 인기로 따지면 웬만한 배우나 가수가 울고 갈 정도다. 학교 내에서 승희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게 유명한 메이퀸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긴 시간 동안 불안하고 슬픈 눈빛으로 주변을 훑고 있었으니 관심과 시선이 모여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억지를 피우다시피 얻어낸 약속이라서 예상 못 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나오지 않을 거라면 전화를 해서 말이 안 되는 변명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여러모로 봐서, 예의를 지켜야 할 사이가 아니던가. 힐끔거리고 숙덕거리는 사람들의 시선쯤이야 아프지만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푼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리고 시퍼런 피멍이 생길 것이 뻔하다. 떨쳐내 보려 애쓸수록 뚜렷해지고 있었다. 견디기가 힘들었다. 서러움이 몰려오고 후회가 밀려들었다. 파고든 불덩어리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 뱃속이 뜨겁고 아렸다. 냉수를 들이켜 보지만 소용이 없다.
데이트가 잘 되고 있을 거라며, 흐뭇해하고 있을 환한 아버지의 얼굴이 영화의 화면처럼 확대되었다. 아버지가 안쓰러워서 억지스럽게 날을 잡았었다. 미안한 마음에 설움이 복받치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아보려 메여오는 목청에 온 힘을 쏟아붓자 눈동자로 설움이 옮겨붙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이나 차지한다는 말을 듣고 있는 큰 눈이다. 유난히 하얗고 깨끗해서 윤기가 나는 흰자위에 벌겋게 핏발이 서고 눈물이 가득 고였다. 반짝거리는 눈빛과 불빛이 어우러져서 절절한 설움을 드러내며 후회도 드러내고 있었다. 목 놓아서라도 울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