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혜야! 아빠가 그 사람하고 데이트하라며, 택시까지 대절 해주셨다! 그런데 어쩌지.”
무척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민경혜가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항상 힘이 되어주고 이해하는 민경혜지만 창피했다. 김수곤을 별것 아니라며 우습게 여기며 깔보는 친구의 앞이라서 죽어라 하고 술을 마셨다. 일부러 심하게 비틀거렸다. 술을 핑계 삼아서 설움과 후회를 토해내느라 심한 술주정도 했다.
경혜도 수곤을 안다. 그를 두고 윤승희의 아버지가 나서서 점찍어 놓고 이러쿵저러쿵 설계하는 것도 안다. 대놓고 뭐라 하진 않았지만, 수곤이 마땅찮았다. 김수곤이 보이는 지나친 집중력과 이글거리는 야망이 무척이나 천박하게 느껴졌었다.
“시간 맞춰 왔다가……. 가버리지. 뭐 하러 기다려.”
민경혜는 속이 상했다. 김수곤이보다 잘나고 멋진 남자들이 얼마든지 많지 않던가. 내로라하는 집안의 황태자가 구애하느라 물량 공세를 퍼부어대기도 했으며 자수성가로 큰 성공을 거두고 화제가 된 청년이 공개적으로 구애를 보내기도 했다.
김수곤은 머리가 좋고, 똑똑해서 겨우 사법고시에 합격해 놓은 것밖에 없었다. 비교조차도 되지 않을 만큼 좋은 조건의 남자들이 안달하고 있지만, 김승희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고 있었다. 오로지 아버지가 점찍어 놓았다는 이유로 포박된 그녀다.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청승을 떤다. 한심하고 안타깝다.
“글쎄. 내가 왜 이러지. 아빠가 너무 불쌍해. 흑흑.”
저렇게 흐트러진 윤승희를 본 적이 없다. 다리가 꼬이고 허리가 꺾인다. 가느다란 몸매가 갈대처럼 흐늘거린다. 어깨에 멨던 핸드백 끈을 한 손으로 움켜쥐어 걷어내서 핸드백을 저만치로 동댕이쳤다. 큰 키에 굽이 높은 하이힐을 신은 터라 휘청거릴 때마다 바닥에 곤두박질쳐지는 것만 같다.
승희는 종업원의 도움이 없다면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만취했다. 정신을 놓아 버린 승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둘씩이나 동원된 종업원의 부축으로 현관에 이르렀고,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는 대절택시에 간신히 태웠다.
“아저씨. 봉천동으로 가세요.”
윤승희의 의견을 묻지 않았다. 아니 물을 필요가 없었다. 김수곤은 순진무구하며 온순하기 그지없고 기분 나쁜 꼴을 당하고도 속으로 삭이고 마는 친구를 인사불성으로 만들었다. 그가 밉고 얄미웠다. 그러잖아도 밉상인데 어이없는 행동을 하는 터라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만나서 대신 따져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민경혜의 얘기에 윤승희는 펄쩍 뛰었다. 인사불성이 되어 몸을 부려놓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윤승희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었다. 주변에서 억지를 피워서 마시게 되면 겨우 한두 잔이 고작이었다. 술을 마시지 못하기에 술자리를 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데 그것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평소 한 교육의 영향이었다. 아버지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김수곤의 아내로서의 품격과 교양을 당부해서 그랬다. 김수곤에게 일거수일투족을 맞춰놓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버지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의 뜻에 따르느라 본능까지도 자제하는 그녀가 가여웠다.
“아저씨! 저히 집으로 곧장 가세요.”
“제 말대로 하세요!”
경혜는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치고 주장대로 행동하는 여자였다. 반면, 여리고 소극적인 승희다. 그런 경혜와는 너무 달랐다. 승희가 메이퀸에 나설 때도 그랬다. 주변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런 자리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그런 그녀를 설득하고 윽박질러 내보낸 사람이 민경혜다. 그녀의 저돌적인 추진력이 승희를 메이퀸에 등극시켰다. 항상 승희는 결국, 경혜의 고집에 꺾이고 만다.
수곤의 집 앞에 택시가 섰다. 경혜가 승희를 제쳐놓고 후다닥 내렸다. 굳은 표정으로 군인이 행군하듯 강하고 맹렬하게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큰 마당에 서서 큰소리로 목청을 높였다.
“김수곤 씨!”
초겨울 날씨라서 방문들이 모두 닫혀 있다. 불이 켜져 있지만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한 번 더 큰 소리로 불러보지만, 반응이 없다. 분명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테지만 반응이 없다. 상한 감정이 앞서서 안채로 다가서자 여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김수곤 씨를 찾아왔습니다만.”
민경혜의 태도에 여자가 멈칫거렸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는 자신을 무척 경계하는 눈초리라서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공손해졌다.
“승희 친구 경혜라면 알 겁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문이 드르륵 열렸다. 김수곤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무척이나 반가운 말투였다.
“경혜 씨가 웬일입니까?”
김수곤의 얼굴을 마주하자 화가 치밀어 올라 깡통을 걷어차듯이 말로 쏘아붙였다.
“집에 계셨군요.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생겨 집에 없는 줄 알았는데. 이럴 거면 약속을 하지 말든지. 이게 뭡니까!”
김수곤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황당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 약속을 어겼지만 그래도 당사자가 아닌 민경혜가 나타나서 다짜고짜 따지는 것은 심한 일이다. 거침없고 당당한 민경혜 같은 여자보다는 항상 순종하고 조용한 윤승희가 훨씬 좋다. 그렇지만 배경이 엄청난 민경혜에게 관심이 많았다. 민경혜를 그렇지 않아도 만나고 싶었다. 어찌 됐건 찾아와준 경혜가 오히려 잘 되었다 싶다. 경우 없이 다짜고짜 덤벼들지만, 꾹꾹 눌러 참는다.
“밖에서 이러지 말고 제 방으로 들어갑시다.”
김수곤은 마루에서 마당으로 황급히 내려섰다.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짓고 민경혜에게 변명했다.
“아, 오늘 약속한 일로 그러시는구나. 오늘 중요한 일이 있어서 지방에 갔다가 좀 전에 들어왔습니다.”
김수곤의 변명에 민경혜의 목청이 더 높아졌다. 남의 상차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고 있었다.
“전화할 수 있잖아요!”
“전화가 없는 곳이라서 못했습니다.”
주제를 넘는 행동이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런 자신의 행동에 불쾌한 반응을 보이면 이때다하고 퍼부으려고 했다. 그런데 김수곤은 예상과 너무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진심인지는 모르지만 어이없는 자신의 추궁에도 친절히 해명하고 있었다. 여태껏 가졌던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승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많이 속상해할 것 같은데…….”
김수곤이 승희를 걱정해주자 민경혜는 품었던 전의가 누그러졌다. 목청을 높였던 자신이 머쓱해지기까지 했다.
“택시 안에 있어요.”
대문 밖으로 후다닥 걸어 나갔다. 아주 반가운 손님을 마중하려는 것처럼 부산스러운 행동을 보이며 재빠른 걸음걸이로 걸어 나갔다. 겨우 수분이 지났다. 공주님을 모시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융숭한 태도로 윤승희를 데리고 들어왔다. 동생을 위하는 것처럼 아주 자상한 오빠가 되어서 행동하고 있었다.
“경혜 씨가 우리 승희 친구라서 든든합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민경혜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베푸는 여러 도움이, 유약한 윤승희에게는 크고 작은 일에서 큰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터라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김수곤과 윤승희는 동갑내기다. 그런데도 김수곤은 민경혜를 의식하느라 동생 취급에 열중이었다. 민경혜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그의 행동이라서 배배 꼬았다.
“우리 승희라고 하니까, 어찌 들으면 친오빠 같기도 하고 달리 들으면 애인이 하는 말로 들리는데요. 승희와 동갑 아니세요? 그럼 오빠는 아닐 것이고……. 애인이 하는 말로 들으면 되나요?”
“왕년에 내가 승희 스승이었습니다. 후후 비록 나이는 같지만 마치 동생처럼 생각될 때가 많았습니다. 그 이상은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고……. 하하하.”
김수곤은 이때다 싶게 서슴없이 자기 생각을 드러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하는 말 같았다. 윤승희의 눈빛이 흔들렸다. 순식간에 큰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담겼다. 사력을 다해 울음을 참아내 보지만 부끄럽고 후회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