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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국 경희대학교 명예교수/경제학 박사 |
(뉴스시선집중/이용진 기자)누구나 어머니에 대해서는 아련한 기억들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엊그제 김장을 하면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다. 우리 집 할머니는 파평 윤씨 종가댁에서 시집오셨고, 고모할머니는 창평 고씨댁 맏며느리이시다. 우리 어머니도 박교리댁 (현재라면 문교부 차관에 해당) 손녀였고, 우리 집도 기제사에 모시는 분이 11분이시다. 아버지도 장성 하서선생 필암서원 도유사셨고, 나도 성균관의 작은 직책을 맡았었다.
지금처럼 경제가 제일인 세상에서 그리고 강남 아파트 한 채에 수십억원 하는 세상에서 이런 이력은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고이 간직하고 싶은 우리 집안 내력이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옷을 함부로 입는 분은 아니셨다. 그러나 김장을 하실 때는 꼭 고운 한복을 입으셨다. 분홍색 윗저고리에 진한 푸른빛 치마가 지금도 선하다. 시골집이야 그렇게 크지 않지만 그래도 김장할 배추, 무우 등을 쌓아 놓으면 대청 앞 긴 토방이 가득 찼다. 김치 종류도 많았다.
바로 먹을 김치, 오래두고 먹을 김치, 석박지, 보쌈김치, 빠개지, 동치미, 싱건지 등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최소 열가지는 넘었었던 것 같다.
동네 아낙들이 거의 모여 김장을 하면 어머니는 그 사이사이에 간섭도 하시면서 먹을 음식들을 준비하시느라 분주히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 선하다. 할머니께서는 원래 말이 없으신 분이지만 마루 위에 앉으셔서 “소금이 부족한 것 같다. 소금 더 넣어라. OO 애미는 왜 이리 굼뜨다냐. 빨리빨리 좀 해라.” 조용한 분이시지만 꼭 집어 일을 재촉하셨다.
나는 그 때 왜 어머니가 고춧가루를 많이 쓰는 김장 날에 구태여 곱게 한복을 입으시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엊그제 나도 김장을 하였다. 좀 이상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미국 유학시절에도 나는 김장을 하였다. 사다 먹는 김치가 너무 맛이 없고, 어머니가 담가주신 김치를 잊을 수 없어 직접 김장을 한 것이다. 다행이 어느 미국인 농부가 동양배추(차이니스 케비지라고 부름)를 키워 팔았기 때문에 배추는 쉽사리 구할 수 있었다. 한인상회에 가면 나머지 재료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바쁜 유학시절에도 김장을 해서 먹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틀림없는 토종 한국인이다. 얼굴도 확실한 동양인 얼굴이고, 입맛은 철저하게 우리나라 전통음식을 선호한다. 보통 햄버거를 500개 먹으면 유학생활이 끝난다는 말이 있었다. 내가 당시에 먹은 햄버거는 아마 50개를 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항상 도시락을 싸가지고 학교에 갔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의 이상한 입버릇을 말없이 맞춰 준 아내에게도 고맙게 생각하여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최근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입맛이 옛날로 돌아가는 것 같다.
사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건강 때문에 싱겁게 만드는 아내의 음식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많은 반찬을 요구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김치가 맛이 없거나 음식의 간이 맞지 않으면 매우 못 견디는 편이다.
그래서 안사람과 타협을 보았다. ‘당신 귀찮게 하지 않고 내가 김장을 할테니 아뭇 소리하지 말라.’는 조건이었다. 마누라도 나쁠 것이 없어서인지 그러라고 손쉽게 대답하였다.
배추까지 절이기는 너무 힘이 들어 절인배추는 사기로 했다. 이전에도 사서 김치를 담근 적이 있지만 그때는 실패했다. 왜냐하면 탁송 중에 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방부제를 섞었는지, 도대체 김치가 익지 않고 계속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주위 나이 드신 분이 김장을 하신다기에 염치불구하고 부탁을 하였다.
하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여기서도 작은 실수가 있었다. 나는 20Kg을 부탁했는데 20포기를 절인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고맙다고 말하고 가져 왔다. ‘그래 뭐 김치 많아 걱정할 일 있나? 김치국도 끓이고 만두도 하고 그러면 되지 뭐...’
야무지게 마음을 먹었지만 20포기 김장은 정말 작은 양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도움의 손길을 얻어 김장을 하였다. 무우 김치까지 더 하니 거의 아홉통이 넘는다. 기분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힘이 들었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끝내고 나니 기분은 좋았다. 갈치젓갈과 청각, 조기 등을 충분히 넣어서인지 어머니가 해주신 김치와 맛도 비슷하여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김장이 끝나고 나서 청소를 하면서 다시 어머니 생각이 났다.
난 겨우 20포기를 하면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입은 옷에는 고춧가루 투백이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전혀 그러지 않으셨다. 고작 윗저고리 소매를 짧게 한두번 접으신 것이 전부였지만 윗저고리에도 치마에도 고춧물 없이 거의 깨끗하셨다.
이게 고수(高手)의 솜씨인가? 이게 양반집 자손의 태도인가? 그러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 왜 한복을 곱게 입고 김장을 하셨는가?’ 였다. 나는 김장을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김장을 하신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겨우 내내 먹을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었고, 조상님들과 이웃들에게 나눌 음식을 만드신 것이었다.
단순한 김장이 아니라 귀중한 일을 하신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나름대로 ‘의식’을 차리신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어머니가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 사실 어머니는 나를 그렇게 많이 챙기신 것 같지는 않다. 고등학교 때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 한참 쳐다보시고 나서 “집안이 잘 되려면 큰놈이 잘 되어야하는데.” 내가 서울대학교를 합격하였을 때, 그것도 제법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였을 때도 어머니는 그리 기쁜 표정을 지으시지 않으셨다. 남들이 있을 때는 자랑을 많이 하셨다고 하지만 내 앞에서는 그리 칭찬의 말씀도 없으셨다.
아마 내가 아니고 형이었기를 더 바라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어머니가 지금 계시지 않는다. 하늘 어디에 계시는지 잘 모르겠다. 노계 선생님의 시조처럼 “유자 아닌지는 판연히 알려마는 품어사 반길 이 없으니 그를 설워 하노라.” 라는 생각이 든다.
이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자꾸 흘러내린다.
“어머니...,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