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수 아버지
밝 덩 굴
나는 오늘, 삼십 년도 훨씬 넘어서 나보다 여러 살이 아래인 고향 후배를 만났다.
계수는 초등학교를 중도에 그만 둘 만큼 가난했었다. 그러기에 배고프고 입지 못하는 서러움이 그를 그대로 두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계수는 중국집 음식 배달 소년으로부터 웬만한 한정식관 주방장까지 했다고 했다.
내가 그 사람 집을 찾았을 때, 이게 자기가 경영하는 음식점이라고 했다. 음식점 이름이 ‘한.중 음식점’이었는데, 정작 파는 음식이 한식뿐인 것을 보면 중국 음식점과 한국 음식점에서 잔뼈가 긁은 사람의 보답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 둘은 술이 어지간히 올랐다. 나는 그가 이렇게 용하게도 잘 사는 것을 보고 기쁜 나머지 한마디 말을 건넸다.
“여보게, 자네. 장하구먼. 참, 좋으네.”
“예?!”
“자네가 이렇게 잘 사니 좋단 말일세.”
“그래유? 저는 뭐, 형님 알다시피 뭐 있어유? 배운 것도 없구, 돈도 없구유. 그래서 그런지 남이 많이 도와주더구만유. 그냥 좀 사는 편이 유. 암만유.”
나는 오늘 계수를 보면서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계수 아버지는 이백 근이나 실히 될 거구였다. 배는 남산만하고 혹이 우습게 매달려 있었다. 거기에다가 시옷(ㅅ)자로 난 수염은 채플린 같은 담담한 서글픔까지도 있었다. 계수 아버지는 호박꽃처럼 비지시 웃고, 아다다처럼 반굴림소리를 내었다. 계수 아버지는 배꼽이 한참이나 보이도록 굇말을 늘어뜨리고 다니는 배불뜨기 사장이었다.
계수 아버지가 아침 일터로 나갈 때는 요란하기 그지없다. 이 동네 아무 누구도 그를 보지 않고도 다 계수 아버지의 거동을 안다.
킹콩 같은 걸음소리가 구들장으로 오고, 기침을 크게 한번 할라치면 으레 방구소리가 동반되는 데, 발자국과 장단이 맞추어지며 한 열 번은 그렇게 꾸어대며 걷는다.
이때, 동네 사람들은 흐뭇한 웃음을 웃는다. 누구 하나 경박한 걸음걸이라든가 방구 뀌는 주착박아지라든지 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인식된 생각의 바탕에는 계수 아버지의 그 어린애 같은 순수한 마음보가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게다.
농번기의 계수 아버지는 참으로 바쁘다. 어느 집이든 계수 아버지가 일해 주었으면 했다. 계수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먼저 논에 들어가고, 누구보다도 늦게 밭에서 나온다. 계수 아버지는 남보다 두 배로 일하고, 그 대신 밥도 두 배로 먹는다. 계수 아버지는 남이 열 번을 말하면 “암만유, 그렇구 말구유.” 그저 그 말 한 마디뿐이다.
계수 아버지는 동네 궂은일은 혼자 도맡는다. 늙은 할배가 혼자 사는 초가삼간의 추운 지붕을 엮어주고, 놀던 아이가 유리 조각에 피 흘릴 때는 겁먹은 얼굴로 김 의원 집을 찾는다. 계수 아버지는 몹쓸 병이 들어 죽은 할매의 송장도 아무 말 없이 혼자 치다꺼리 하고 염도 한다.
그러나, 계수아버지는 일찍 죽었다. 무슨 병인 줄도 모르고 소문도 내지 않고 슬그머니 떠났다. 동네 사람들은 육십도 안 되어 죽은 계수 아버지를 안타까워하고 슬퍼했다.
“그렇게 착하디착한 사람이 저렇게 무심히 죽다니?!”
“우리 집 일은 누가 내일처럼 해주나?”
“에이그, 불쌍도 하지. 저렇게 많은 아이들을 남겨 놓구.....?”
“우리 집 농주는 이제 누굴 줄꼬?“
오늘, 나는 계수를 보면서 이렇게 기쁜 줄을 이제 알았다. 나는 지금, 내 앞에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친구가 자기의 석학을 뽐내면서 산해진미를 향유케 한다 해도 지금처럼 기쁘지 않았을 게다. 나는 내 앞에 황진이(黃眞伊)가 버선발로 나타나 임제(林悌)의 한을 풀어준다 해도 지금처럼 즐겁지 않았을 게다.
배가 남산만하고, 에데데 하는 말투로 ‘’암만유‘를 연발하는 계수(桂樹)를 보면서 이렇게 즐거운 것은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보게, 자네 아버지는 자네를 낳고 휘 맑은 달을 쳐다보면서 그 곳 에 계수나무를 심은 거구먼!”
“여보게, 자넨. 꼭 자네 아버지이고, 자네 아버지는 꼭 자넬세 그 려.....!
밝덩굴
0.한국수필 천료. 서울문학 시조 신인상
0.한국문인협회 경기지부장. 경기한국수필가협회 회장.
경인시조시인협회 회장 지냄
0.경기중등 교장. 법무연수원, 한경대, 협성대 강사 지냄
0.고교 국어(문학)모형 연구개발 편찬 심의 위원 지냄. 한글학회 회원
0.수필집: ‘아버지와 한겨울’. 시조집 ‘달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