헛발질
오늘 최정환의 가게에서 친구들과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김수곤은 괜한 시간 낭비 같아서 몇 번이나 망설였다. 자신의 합격을 축하해주는 모임이라지만 관심이 없다. 김희성의 소식이 더 궁금했다.
“야, 오랜만이다!”
가게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친구들의 환호였다. 이십여 명이 넘는 친구들이 내지르는 인사말이 눈도장을 찍으려는 아우성처럼 들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대하는 얼굴들이라서 낯설다. 김수곤은 그러잖아도 빳빳하게 세웠던 고개를 더 높이 쳐들어서 빙 둘러싼 동창생들의 얼굴을 한 명씩 살펴 가며 악수하고 있었다.
“졸업하고 처음 보는 거지!”
짝꿍이었던 친구다. 한동네에 살았지만, 초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마주친 적이 없다. 물론 어렸을 때지만 부잣집 아들이라서 늘 부러워하며 함께 컸다. 한눈에 알아보지를 못했는데 예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최정환은 여러 번이나 통화하면서도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었다. 그렇더라도 마주하면 알아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분간해 낼 수가 없었다. 사춘기로 얼굴이 변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다. 전화통화로 들었던 목소리를 기억해내서 찾아보려 해보지만 쉽지가 않았다.
“누가 최정환이냐?”
웃음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덩달아 따라 웃어주는 김수곤의 귀에 낯익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속에서 들었던 웃음이었다. 최정환을 알아냈다. 코앞에 두고 최정환을 찾았던 터라서 그랬던 것 같았다. 최정환을 와락 끌어 앉았다. 오랫동안 떨어졌던 이산가족이 만나는 것처럼 힘껏 끌어 앉았다. 친구들의 박수가 쏟아졌다.
“내가 정환이를 못 알아봤겠니? 한 번 웃어 보려고 그랬지. 하하하”
동창생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 이후로 고향을 거의 찾지 않았다. 고향을 찾을 필요가 없어서다. 윤승희네 집에서 기거하는 그의 학비와 생활비는 윤승희 아버지가 알아서 처리했다. 오히려 친자식보다 더한 대접을 받으며 살았다. 설움과 억울함만 떠오르는 고향이어서 더 멀리했던 터라서 사춘기를 거친 동창생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김수곤의 한 마디에 분위기가 풀어졌다. 동창회장이라며 부잣집 아들이 나서서 친구들을 소개하는 틈 사이에 낮 설지 않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여러 사람과 섞여 있지만 단연 돋보였다. 한 눈으로 봐도 귀공자티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김희성으로 직감되었다.
“2학년 때 서울로 전학 갔는데……. 기억이 날지 모르겠다.”
“기억하지. 김재옥 의원 조카. 김희성!”
“니가 나를 찾았다며?”
지난번에 지나가는 얘기처럼 던져놓은 말을 잊지 않은 것이다. 최정환이 달리 보였다. 최정환의 기억에는 김희성이 없었다. 그런 그를 찾아내서 데려다 놓았다. 수고도 수고지만 마음이 고마웠다.
“내가 이 친구를 찾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말도 마라. 전화를 백통도 더했다. 아는 사람이 있어야지. 김재옥 의원 사무실에 전화해도 모르지. 다행히 박준영한테 부탁했더니 이리저리 알아봐서 알려 준 거야. 어렵게 모신 도련님이야. 하하하”
최정환이 너스레를 떠는 사이에 악수하고 있던 김희성의 손을 세차게 잡아끌었다. 마치 이전부터 잘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끌어 앉고 깊게 포옹했다. 김수곤을 알아보지 못한 김희성이 오히려 과장된 김수곤의 행동을 이상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더니 면박을 주었다.
“전혀 기억이 없는데……. 나를 알아?”
김희성은 거만한 눈빛으로 김수곤을 깔아뭉개고 있었다. 하지만 김수곤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기억이 있든 없든 무슨 소용인가. 또 면박을 주든 말든 상관없다. 이제부터라도 인연을 만들면 되고 면박이야 무시하면 된다. 모욕감이 순식간에 온몸에 퍼지지만 무슨 상관인가.
“그렇지 나를 기억 못 할 거야. 한 동네 살았고 같은 학교에 다녔지만, 넌 도련님이었지. 감히 어울려 볼 엄두도 내지 못했으니까……. 당연해. 하하하.”
초라했던 과거의 모습이 가슴을 짓눌러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스스로 꺼내 놓고 비위를 맞추느라 너스레를 떨었지만, 가슴이 쓰라렸다.
“나를 무척 찾았다며?”
“무척 이라기보다는 그냥 한번 보고 싶었어.”
“영감 됐다며?”
“뭐 아직 영감 된 건 아니고……. 이제 시작이야.”
김희성은 김수곤의 대답으로 기세가 더욱더 등등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짐작이 들어맞았다는 표정으로 위세 떨기에 바빴다.
“나보다는 우리 큰 아버지를 찾았겠지! 허허허.”
무척 직설적이어서 듣기가 거북했다. 물론 김재옥 의원의 조카라서 만나려 하는 것이므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예의가 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처음으로 만난 사이인데도 대뜸 위세부터 떠는 것을 보니, 가볍고 경솔한 사람이라 여겨졌다. 박준영하고는 다른 것 같았다. 오히려 기회가 되는 것 같아 기분이 괜찮았다.
“맞아. 니 빽 좀 써보려고 그랬다. 그러니까 좀 도와줘. 하하하.”
자신을 선망하는 동창생들 앞이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실을 앞세워서 자랑하고 위세도 부려보려 했다. 하지만 김희성의 말 한마디로 체면이 무참히 구겨졌다. 김희성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결코 그냥 보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김수곤은 감정을 꾹꾹 눌러서 농담으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만약 아버지의 뜻대로 공장에 보내져서 기술을 배웠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루 열 시간이 넘는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허름한 셋방에 지친 몸을 부려놓고 짐승처럼 살고 있을 것이며 얼마 되지 않는 월급도 아버지의 술값으로 탕진 당하고 불만이 쌓여서 사납게 망가져 있을 자신이었다. 윤승희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지금의 자신이었다. 아버지보다도 더한 사랑으로 위해주고 아껴주었던 분이다. 그가 그리웠다.
“여보세요. 사장님 좀 부탁합니다.”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 보니 열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혹시나 해본 전화였는데도 연결되고 있었다.
“누구시라고 전해 드릴까요?”
“김수곤입니다.”
“김수곤 씨라고요?”
상대방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외전화라서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크게 내지르는 음성에 귀청이 따가웠다.
“수곤이냐? 우리 영감님이 웬일이야!”
무척이나 흥분된 목소리였다. 윤승희 아버지가 되묻는 남자의 얘기를 듣고 전화기를 빼앗듯이 가로채서 들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김수곤의 전화는 합격하고 나서 처음이었다. 윤승희 아버지는 몇 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왔었다. 그때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석연찮은 핑계를 들어야만 했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가 걸어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때마다 허사였었다.
윤승희 아버지는 매일같이 술과 함께 살고 있었다. 코흘리개인 김수곤을 데려다가 온갖 정성을 다해 키우다시피 했다. 물론 김수곤 자신이 노력하고 잘나서 이룬 성과이기는 했다. 하지만 윤승희 아버지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김수곤의 오늘은 없을 것이다. 자신보다 더 생각이 많은 어린 김수곤을 놓고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저씨 저 수곤입니다. 참 고마웠습니다.”
“야! 서운하게 무슨 말을 그렇게 하냐? 우리 사이에 고맙고, 말고 할 일이 뭐가 있냐! 그런 말은 하는 것이 아니다. 남에게 하는 말 같잖아!”
김수곤을 윤승희 오빠보다도 더 믿고 의지했었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걸어온 전화라서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무슨 일 있는 거냐? 말해 봐!”
돈이 필요 하느냐 말이었다. 비록 가정교사를 하느라 따로 기거했지만, 때가 되면 꼬박꼬박 용돈을 보내주고 있었다. 또 김수곤의 부모에게도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이를테면 김수곤네 살림을 도맡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고 필요하면 말해. 내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돈 버는 재주가 있으니 니가 필요한 만큼은 언제든지 마련할 수 있다. 물론 더 큰돈이 필요하더라도 염려 말고.”
윤승희 아버지는 수곤이에게 큰돈이 필요해질 것으로 판단했다.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에 따르면, 그래야만 그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고 했다.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제가 왜 큰돈이 필요하겠어요? 괜찮습니다. 저는 항상 아저씨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수곤은 돈이 필요 없다며 거듭 강조했다. 그러자 윤승희 아버지는 아껴두었던 얘기를 슬쩍 꺼내 놓았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