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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시향] 흔적도 없이 살아지는 그날까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박가을

우리가 살아왔던 시간

흔적도 없이 살아지는 그 날까지

남아있는 작은 것까지도 지워갑시다

가슴 깊이 그리워했던 날

눈시울 붉히며 보고 싶었던 날도

바람처럼 이슬처럼 살아지고 말았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그날까지

언덕 밑 조그만 집을 짓고

먼지 쌓인 책장을 넘겨 가며

찻잔을 앞에 놓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며 살아가요

지금은

다 비우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며

덧칠하는 삶을 만들어 가지만

시린 어깰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사람

그 사람이 당신이라서 뭐 바랄 게 있을까요

    

반백년을 살아온

우리가 걸어가는 동화 같은 인생길

100이라는 숫자만큼 채우고 채워가며

흔적도 없이 살아가는 그 날까지 같이 같이갑시다

헐거워지면 웃고 단단해지면 또 웃으면서

처음 불러보았던 그대 이름이 달고 달아서

지워진다 해도 또렷하게 부르고 또 부르리라

    

내 사랑하는 사람아

보고 또 보아도 가슴아린 사람아

, 내가 길을 잃고 헤매더라도 떠나지는 마오

늘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 내 당신을

천리길 먼 길이라 해도 맨발로 단숨에 뛰어가리다

햇빛 고운 창가에 앉아 시집 한권에 눈시울 붉히면

그대와 달려왔던 지난 기억을 하나둘 내려 놓으려 합니다

내 사람아

흔적 없이 사라지는 그 날까지 같이 걸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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