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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의 플래시가 쉼 없이 터졌다. 너도나도 마이크를 들이대서 질문을 퍼붓지만 묵묵부답이었다. 50명도 넘는 기자들에게 포위되었다. 이리저리 휩쓸리며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양팔이 붙잡혀 쫓기듯이 걷는다. 겁먹은 표정이고 눈동자의 초점도 잃었다. 화면을 통해 보는 것이지만 무시무시하게 느꼈던 카리스마는 어디에도 없다. 손과 발, 심지어 머릿속까지 꿰뚫어 보던 권총진이 아니던가.
상대방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외전화라서 잘 들리지 않아서인지 크게 내지르는 음성에 귀청이 따가웠다. “수곤이냐? 우리 영감님이 웬일이야!” 무척이나 흥분된 목소리였다. 윤승희 아버지가 되묻는 남자의 얘기를 듣고 전화기를 빼앗듯이 가로채서 들뜬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김수곤의 전화는 합격하고 나서 처음이었다. 윤승희 아버지는 몇 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왔었다. 그때마다 하숙집 아주머니의 석연찮은 핑계를 들어야만 했었다. 소식을 전해 듣고 전화가 걸어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때마다 허사였었다.
“사모님! 사장님 전화에요.” 아래층에서 가정부가 내지르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 번째나 전화를 걸어온 윤승희 아버지여서 남편의 전화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괜히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정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미워져서 하는 말이었다. “전화한다고 해! 넌 목소리가 왜 그렇게 커? 목청 낮춰!” 윤승희 엄마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권부 핵심에 근무하는 사람이라서 겪어보지 않은 일이 거의 없다. 온갖 이권을 놓고, 생명을 걸어서 싸우는 곳이니만큼 별별 사람들이 꾸미는 기상천외한 수법들을 수없이 보고 겪었다. 박영달은 그것을 목격하고 조사하며 다루는 것이 주된 업무였다. 초등학교 삼학년인 어린애가 데모를 주동해서 이용했다니, 온전히 믿을 수가 있는가. 한데, 그것도 부족해서 뒤를 봐준 사실을 알고 교장을 협박했다니 말이 되는가.
권총진이 어느새 뒤따라 다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김순두 교수 옆자리에 자리를 잡더니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창밖을 내려다본다. 심장이 떨리고 오금이 저려온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맥 풀린 모습이 되어 주저앉는다. 분풀이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수수방관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저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영규는 자리를 옮겨 앉아서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파묻었다.
“경혜야! 아빠가 그 사람하고 데이트하라며, 택시까지 대절 해주셨다! 그런데 어쩌지.”무척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민경혜가 한걸음에 달려와 주었다. 항상 힘이 되어주고 이해하는 민경혜지만 창피했…
약속한 시각이 한참이나 지났다. 그렇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기다리느라 주문이 늦어져서 건네는 말이라 판단되지만 부끄럽다. 늦으면, 늦는다고 못 올 형편이면, 못 온다고 전화라도 해주어야 옳다. 하지만 김수곤은 그럴 기미조차도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가슴이 시꺼멓게 타고 있었다. 윤승희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피던 종업원의 한마디에 괜히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쪼그라들어서 대꾸를 제대로 못 하고 애써 시선을 회피하고 있었다.
“방에 없는데…….” 주인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놓쳐버린 기차의 기적소리처럼 들려왔다. 김수곤의 방은 안방의 맞은편에 있다. 안방에서는 앉아서도 드나드는 것을 훤히 알 수가 있다. 더더구나 가정교사의 입장이라서 허락을 받고 외출했다. 김수곤은 항상 그래왔었다. 그런데 나가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오래되었나요?”
아버지의 응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소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차갑고 계산적인 김수곤을 놓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똑똑해서 장래가 촉망되는 것 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다. 특히 사람 냄새를 풍기지 않는 그였기에 더 내키지 않았다.
-연작 소설- 혼돈의 계절그날 김수곤을 처음 봤다. 두꺼운 외투는 고사하고 낡아서 찢어질 것같이 얇은 교복 하나만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렇게 추운 날인데도 고통스러워 하는 표정을 짓거나 몸을 움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