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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공무원문학 여름호 통권 제50호(발행인 김완용)/류시호 논설위원

모란을 부귀(富貴)로 비유하여 모란 무늬가 길상무늬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모란꽃과 조선시대 문화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얼마 전, 국립고궁박물관의 모란전시회를 갔다. 이번 전시는 조선 왕실에서 모란이라는 식물과 그 무늬를 어떻게 즐기고 활용하였는지를 보여주고, 모란에 담긴 다양한 문양을 소개했다. ‘모란은 벌써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 오네/----’ 이 노래는 조영남의 <모란동백> 으로 안국동의 서울복지센터에서 기타 강습을 받으며 열심히 연습하던 곡으로 모란전시회를 보니 더욱 이 노래가 생각난다.

모란은 신라 진평왕 시절 한반도에 전해졌고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식물 자체는 물론 무늬로도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그리고 모란은 고려 시대 궁중과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책에는 국왕이 신하들과 궁궐 안에 핀 모란을 감상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10세기, 중국 오대(五代) 때 처음 나타난 모란 무늬는 대표적인 길상(吉祥)무늬로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었고, 민간과 왕실 등 광범위하게 사랑받았다. 진나라 도연명은 국화를 사랑했고, 송나라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君子)와 비유하며 연꽃을 사랑했다. 당나라 이후 많은 사람이 모란을 사랑했다. 주돈이는 애련설(愛蓮說)이라는 산문에서 연꽃을 꽃 중의 군자로, 모란을 부귀(富貴)로 비유하여 모란 무늬가 길상무늬로 유명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모란 무늬는 고려 시대와 조선 말, 대한제국까지 꾸준히 쓰였다. 조선 왕실에서는 각종 의례·생활용품 등에 모란 무늬를 즐겨 사용하였다. 특히 행복한 삶을 기원하는 결혼식과 관련된 의복, 부채, 병풍 등 여러 물건에 모란은 장식용 무늬로 많이 사용되었다. 19세기 이후 행복을 강조하는 풍조가 강하게 나타나 다양한 길상무늬가 유행하였다. 그래서 모란은 좋은 일에 많이 활용되어 각종 생활용품과 공예, 건축물 등에 화려한 자태로 사용했다.

한편, 모란에 대한 시가 여러 편 남아 있어 모란을 즐기던 선인들의 풍유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학자 김원행은 <우중에 백모란을 읊다>에서 한밤 내내 봄 산에 비 뿌리더니/ 농염한 꽃 하얀 송이 활짝 피웠네. ----’라고 했다. 모란은 조선 궁궐 후원이나 종친들의 정원에 심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원예 취미와 더불어 저술된 원예 책에도 등장했다.

모란은 정원을 꾸밀 때에도 많이 활용하였는데, 궁궐 후원과 사대부가의 주요 작물 중 하나였다. 이 꽃은 수선화와 결합해 화사함을 누리며 신선처럼 살기를 기원하고, 모란은 넝쿨과 어우러져 부귀영화가 영원히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교직에 근무할 때, 방학 때마다 1주일씩 3회를 연수하여 고궁박물관 문화해설사로 추천을 받았다. 고궁박물관은 조선 시대 유물과 문화를 보존하고 전시하기에 연수를 받으면서, 조선왕조실록, 의궤, 승정원일기 등의 그림과 서적, 유물, , 왕의 옥새, 어보 등을 관심 있게 관찰했었다.

요즘은 모란이나 연꽃보다 장미나 벚꽃, 국화, 튤립 등 화려하고 멋진 꽃들이 많다. 모란꽃과 조선 시대 문화를 보며 시대마다 꽃을 좋아하는 취향이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천년이라는 긴 세월을 풍미한 모란을 생각하면, 꽃과 미술, 음악은 우리를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는 것 같다. 코로나 전염병으로 모임도 못하고 갑갑할 때, 박물관, 종묘, 고궁, 미술관, 왕릉 등을 방문하여 인문학 지식도 쌓고 문화 활동을 통하여 즐거움을 찾자. P.S. 이 원고는 2900자인데 지면 관계상 1700자로 올림.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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