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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럼) 연천군 경순왕릉과 적성 영국군 전투비 /류시호 논설위원

경순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외롭다.
   연천군 경순왕릉과 적성 영국군 전투비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지인의 초대로 일산 외곽 다육이 농장에 가서 다양한 종류의 아름다운 열대식물을 감상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을 갔다. 일산에 살 때는 자주 가던 곳이지만 3년 전 감악산에 출렁다리가 건축되어 많은 사람이 찾아온다.  근처에 있는 영국군 설마리전투비에 들렸다. 이 설마리 전투비는 한국전쟁 당시 설마리전투에서 고지가 적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황에서도 끝까지 혈전을 벌이다. 전사한 영국군들의 넋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이 기념비는 주변의 돌들을 채석하여 쌓아 올리고, 상하 각각 2개씩 모두 4개의 비를 부착하여 만들었다. 위쪽에 있는 비 2개 가운데 왼쪽에는 유엔기를 새기고 오른쪽에는 희생된 영국군 부대 표지를 새겼으며, 아래쪽의 왼쪽 비에는 한글로, 오른쪽 비에는 영문으로 당시 전투 상황을 기록하였다. 유엔군의 참전 상황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이어서 연천군에 있는 경순왕릉을 갔다. 신라 제56대 왕이며 마지막 왕인 비운의 경순왕릉은 임진강 건너 개성과 거의 수평선상에 위치해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장단군이었으나 휴전선으로 물러나 연천군이 된 장남면 고랑포리다.  개성이 30, 평양 173라 적힌 이정표를 지나면 경순왕릉이 있다. 옛 개경(개성)의 동쪽이며, 남방한계선 200m 아래쯤의 낮은 야산에서 비운의 한을 삭이듯 밤낮없이 임진강 하구만 그윽이 내려다보고 있다.

  신라의 왕릉이 경주지역을 벗어난 것은 경순왕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진평왕의 옥대와 함께 신라의 천년 사직을 왕건의 무릎 앞에 고스란히 내준 마지막 군주이다. 경순왕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외롭다.  경순왕은 신라 제46대 문성왕의 6대손이며, 이찬 효종(孝宗)의 아들이다. 927년 포석정에서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은 경애왕이 시해되고,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부터가 경순왕의 비운은 예견된 것이었다. 왕위에 오른 것도 견훤의 비호를 받으면서였고, 견훤의 광포한 공격에 대항하여 싸울 국력도 없었다.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는 백성을 버린 왕자라며 통곡으로 왕을 하직하고 용문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갔고, 막내아들은 불법에 귀의, 화엄사에 들어가 범공(梵空)이란 불명으로 수도자가 되는 등 경순왕의 가솔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왕건의 휘하에 들어간 경순왕은 태자의 지위인 정승공(正承公)에 봉해지고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다시 혼인하는 등 귀화인의 예우를 받으면서 여생을 보냈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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