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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덕 양성리(洋城里)유적에서 고려의 해안 방어시설 확인

왜구 방어용으로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목책성곽 확인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의 허가를 받아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에서 발굴조사하고 있는 고속국도 제65호선 포항~영덕간 건설공사(제3~5공구) 내 영덕 양성리유적에서 해안으로 침입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 시대 성곽이 확인되었다.

해안으로부터 서쪽으로 1㎞가량 떨어진 낮은 야산(해발 56m)의 정상부에 자리한 영덕 양성리유적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과 연계하여 장사상륙작전이 진행된 장사해수욕장 일원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시대 성곽은 야산 정상부의 약간 아래쪽 부분을 원형으로 돌아가며 땅을 굴착하고 성벽을 쌓아 올린 테뫼식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계곡을 가로막아 만든 동쪽 성벽까지 고려하면 테뫼식과 포곡식(包谷式)이 혼합된 형태로 볼 수 있다. 성곽은 둘레 약 400m, 내부 면적은 1만㎡가량으로 일반적인 성곽에 비해 규모가 작은 편이라 중요 거점을 보호하기 위해 축조된 보루일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된다.

성벽은 흙과 돌을 섞어 쌓는 토석혼축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는 높이 2.6m, 너비 7m 정도가 남아있다. 성 안쪽에 해당하는 내벽의 경우 땅을 굴착하지 않고 자연지형에 30∼50㎝가량의 산돌과 냇돌을 3~5단 정도 안으로 들여쌓기하여 경사지게 조성되었다.

반면 지대가 낮은 아래쪽 외벽은 원래 지형 일부분을 수직으로 자른 후 바깥쪽으로 산돌과 냇돌을 쌓고 그 안쪽으로는 점토와 모래가 많이 섞인 사질토를 20차례 이상 엇갈리도록 수평(판축형태)으로 다져 넣어 쌓았다. 한편 남쪽과 남동쪽 성벽의 외벽 바깥쪽에서는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 간격(420~470㎝)으로 편평한 냇돌을 두었는데, 목책 기둥을 놓기 위한 시설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서 볼 때 양성리 성곽은 성벽 외벽에 보조적 방어 시설인 목책(木柵, 말뚝을 울처럼 두른 형태)을 두른 형태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목책 관련 시설 주변으로 불에 그슬린 흔적 등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목책은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판단된다.

성곽 내부에서는 건물지(창고?망루시설) 12기,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해안이 조망되는 성곽의 정상부에는 사각의 망루 시설을 만들었고, 그 동쪽으로 온돌을 갖춘 건물지 4동을 조성하였다. 이와 함께 남쪽 성벽 내벽을 따라 사각형의 건물지 7기를 일렬로 배치하였는데, 이 중 일부는 화재로 소실된 후 건물을 다시 조성하여 사용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한편 4호 건물지 내부에서는 디딜방아 시설과 함께 다량의 탄화미가 확인되고 있어 곡식 창고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 문헌 기록들에서 이번 양성리유적 성곽이 언급된 것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고려사?(高麗史)에‘왜구가 강릉부(江陵府) 및 영덕현(盈德縣)ㆍ덕원현(德原縣)을 노략질하였다.(세가 권43 1372년 6월6일), 왜구가 송생(松生)ㆍ울진(蔚珍)ㆍ삼척(三陟)ㆍ평해(平海)ㆍ영해(寧海)ㆍ영덕(盈德) 등지를 침략하고, 삼척현을 불살랐다.(권134 열전 권제47 1381년 3월)’라는 기록을 볼 때, 양성리 일원 주변 역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양성리유적에서 확인된 성곽은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해안가 조망이 유리한 곳에 축조한 당시의 해안 방어시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양성리유적 성곽은 동해안 지역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고려 시대 토석혼축 목책성곽이라는 점과 더불어 성곽 내 건물의 배치, 성벽 축조기법과 구조의 특이함 은 그 당시 성곽축조 방법과 구조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발굴현장은 코로나 19(COVID-19) 진행 추이를 검토하여 추후 일반인에게 공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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