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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조선시대 파주 능행 및 파주목 행행 학술연구 착수

국왕의 왕릉 행차, 파주 행궁 역사적 사실 조명

파주시는 조선시대 파주 능행(陵幸) 및 파주목 행행(行幸) 학술고증연구 용역에 착수했다고 24일 밝혔다.

파주목 학술고증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이번 연구는 조선시대 국왕의 파주 행차와 관련된 학술자료 구축을 위한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 등 여러 문헌에서 파주목이 조선시대 파주의 행정 치소(治所)면서 행궁으로도 이용됐었다는 기록을 다수 찾아볼 수 있다.

파주시는 2015년 파주목 관아지 문화재 지표조사를 시작으로 2016년 파주목 관아지 복원정비계획 수립했고 2019년 파주목 객사의 건축특징에 대한 학술고증연구를 진행해 객사의 위치 및 형태 등을 규명하고 역사적 의의 등을 고찰했다.

올해는 파주의 능행자료 조사를 통해 능행로 조명, 능행과 관련된 파주목 행행, 행궁 조성 등에 대한 학술조사를 진행해 파주목이 조선시대에 행궁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고 하반기에는 이를 토대로 파주목 관아지 전체에 대한 건축특징을 고찰하는 학술연구를 추진할 계획이다.

파주목은 세조 5년(1459)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의 친정이 있던 곳으로 원평도호부에서 파주목으로 승격된 후 고종 32년(1895) 파주군으로 바뀔 때까지 그 규모와 지위를 유지했으며, 숙종, 영조, 정조 등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여러 왕이 장릉, 영릉, 소령원 등 주변 왕릉에 능행하고 파주목 행궁에서 유숙했다.

또한 파주는 조선시대 서울과 의주를 연결한 의주로의 주요 경유처였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이 한양에서 출발해 북경으로 가는 길에 파주에서 1박을 하거나 왕의 행행 시 파주에서 숙박한 점 등은 파주목의 지리적 중요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파주시 관계자는 “조선 임금이 왕릉에 행차할 때 파주 행궁에 머무르며 객사를 침전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다수 확인된다”며 “임금이 파주 행궁을 방문했을 때 관료에게 파주의 사정을 물어 어려움을 해결해 주기도 했으며 옥에 갇힌 이들을 석방해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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