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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시, 정읍은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이자 성지, 역사 왜곡 바로 잡아 나가야!


[뉴스시선집중, 윤금아기자] 고부봉기가 없었다면 무장기포, 백산대회 등으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이 시작되었을까?

동학농민혁명은 고부봉기로부터 시작됐다. 하지만 일부에서 고부봉기는 고을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학정을 일삼는 고부군수 조병갑을 죽이기 위해 일어난 우발적 민란이기 때문에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은 고부봉기가 아니라 무장기포라 주장하고 있다.

1968년 정읍에서 사발통문이 발견됐다. 1893년 11월에 작성된 사발통문은 고부봉기가 우발적 사건이 아닌 치밀한 준비과정 끝에 일어난 사건임을 증명했다.

특히,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나아갈 것’의 내용으로 볼 때 고부봉기는 지역을 벗어나 봉건사회 부조리에 저항하여 일어난 조선후기 여타 민란과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성격의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에도 불구하고 고부봉기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왜곡되고 축소되면서 지역적 사건으로 폄하되었다.

특히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을 때 ‘동학농민혁명참여자’에 1월의 고부봉기는 제외되면서 역사적 왜곡과 축소는 그 정점에 달했다.

또한, 새로 개정된 한국사 검인정교과서에 동학농민혁명의 1차 봉기는 무장기포라는 서술 내용은 역사 왜곡의 심각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발통문 거사계획을 통해 고부봉기가 발생했고, 이후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승리를 거쳐 전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이제라도 고부봉기가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아 동학농민혁명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고 교육되어야 한다.

지난 2017년 2월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이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신청 대상으로 선정됐다.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던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민간인이 남긴 문집과 일기, 동학농민혁명 견문기록, 조선정부가 생산한 공문서와 보고서, 조선주재 일본공사관이 생산한 공문서 등 전체 175건 약 1만 2천여면이 신청됐다.

그중 사발통문은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첫 번째 문서이다. 사발통문은 동학농민군이 직접 남긴 유일한 자료로, 상징적 의의와 사료적,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크기 때문에 이 같은 평가와 인정을 받은 것이다.

고부봉기 거사 계획을 준비했던 사발통문이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첫 번째 문서로 지정된 것은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읍시장(유진섭)은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126년 전 분연히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이 오늘날 역사적 왜곡으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함은 앞으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며 “이제라도 온전한 평가를 통해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아 나가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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