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세기 동아시아 국제관계 역학
1894년 한국의 갑오년(甲午年) 농민전쟁이 중국의 청일전쟁 그리고 러일전쟁의 정치사회적 원인과 배경적 영향이 되었다. 근대사 아시아의 국제역학 질서재편의 서사적 불씨가 된 셈이다. 중국의 아편전쟁 이후, 유럽 열강과 일본은 아시아 특히 중국대륙을 강제 분할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 싸움에서 청 나라는 영국에 홍콩을 잘라주게 된다. 당시 부패한 청 조정은 리훙장 등을 일본에 협상사절로 파견하는 등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일본은 ‘대동아공영권’ 이란 군국주의 야욕에 찬 제1차 세계대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은 요동반도를 무력으로 장악하여 뤼순(旅順) 대학살사건을 일으키며 청일전쟁에서 깃발을 올렸으며, 북양함대를 파견하여 러시아 해군도 굴복시키어 러일전쟁까지 승리하게 된다.
이미 미-일간에는 태프트-카쓰라 극비조약이 체결되어, 한국의 식민지 밑그림도 이미 그려져 있었다. 즉,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해도 상호간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검은 커넥션이다. 여기에 분노한 미국의 교포 혁명가 전성운과 장인환은 이 조약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스티븐슨을 저격하여 암살하기도 했다. 이때 한국에 대해서 별로 잘 알지 못했던 미국 시민들과 유럽인들 당시 전 세계적 관심이 폭발되기도 했다.
김학철이 태어난 1910년대 후반기는 제1차 세계대전의 뇌관이 터진 전쟁의 공포와 화약연기가 온 지구를 뒤덮었던 시기였다.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와 정치적 역학배경으로 보면, 한국은 1905년 을사늑약 불평등조약에 이어 1910년 굴욕적인 한일합방이 강제되었다.
그로부터 2년후, 일본은 다이쇼오大正 천황이 등극하면서 군국주의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다. 동시에 중국에선 청 나라 황실이 폐지되고 쑨원孫文에 의한 민주적 신중국이 탄생된다. 결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되어 지구는 불바다로 변했다. 근대사에서 한국과 중국은 비슷하게 정치사회적으로 비슷하게 연동되었다.
한국과 중국의 왕권제도가 외세에 의해 종결된 것도 시기적으로 비슷하다. 1919년 한국의 3.1 독립운동이 중국의 5.4 항일운동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21년 중국공산당 창건과 1925년 조선공산당 창건 등 역사적으로도 마르크스, 레닌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이 연동되어 진행되었다.
팽배한 일본 제국주의는 31년 만주사변을 도발하여 동북 3성을 장악하더니 결국 청 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簿義를 ‘만주 괴뢰국’ 최고 책임자로 앉혀 놓았다. 장춘의 꼭두각시 인형이 된 셈이다. 승승장구하는 일본 군국주의는 동남아 인도지나 반도까지 그들의 식민지로 밑그림을 그렸다. 잔혹한 ‘훈도시 식민지’로 상징되는 긴칼 앞에 앞에서 일제는 섬나라 콤플렉스로 대륙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전후, 상해에 임시정부가 설립된다. 상해의 김구를 비롯하여 남경의 김원봉, 북경의 신채호, 연해주의 홍범도, 지청천 그리고 만주일대 동북 3성의 김좌진, 이범석 등의 민족독립을 위한 무장항전이 중국 전역에서 지속되었다. 이미 그 이전 1905년 치욕적인 을사늑약을 전후하면서 홍범도, 지청천, 김좌진 등에 으한 군사적 투쟁은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시작해 왔다.
따라서 할빈의 안중근, 네더란드의 이준, 이상설, 미국의 전성운, 장인환, 베이징의 신채호, 상해의 김산, 윤봉길, 이봉창, 남경의 김원봉, 윤세주 등 전 세계 각 지역에서 항일의거는 지속되어 왔다. 또한 김구, 안창호, 이승만 등은 중국, 미국 등에서 해외 항일거점을 마련해 왔다.
1938년 황포군관학교 장교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선의용군(대장 김원봉)이 창설된다. 대표적인 무장 정규군 부대로 편성된 것이다. 이들은 그 이전의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주축이 된 것이다. 이 부대 장교 출신들이 나중에 중국 전역의 각 무장 독립군 부대 부대장들이 되었으니 실제로 사단병력이 된 셈이다.
일제의 군사적 승전지도가 가장 큰 절정에 서 있었던 1930년대는 일본군의 막강한 신무기와 화력 앞에서 중국군들은 다소 침체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로지 김워봉이 지휘하는 조선의용군 부대만이 최악의 조건 속에서 분연히 지속되었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조직은 조선의용군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군에서도 제1의 체포자 명단에 김원봉이 맨 위에 올라가 있다. 중국의 항일전사에서도 조선의용군의 전투력을 최고로 평가하여 마지막까지 지원해 주었다.
특히 김구와 김원봉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이념적으로 좌-우익 두 줄기의 큰 산맥을 이루었다. 양대세력은 이념적으로 또는 항일투쟁 방법론에 대해서 때로 대결되기도 했으나 궁극의 목적은 오직 민족의 독립을 위한 하나의 목표로 모아졌다. 결국 모든 항일단체들이 상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으로 통합되어 재편성이 되었다. 김구 정부산하에서 김원봉은 총부사령관이 된다.
김원봉은 임시정부 국무위원(군사부장)이며 광복군 총부사령관으로서 전 중국 항일독립군 부대를 지휘하다가 광복이 되어 서울로 귀환한다. 남한에서는 좌익정당 위원장까지 했으나 이승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하여 김구의 남북형상 때 월북한다. 그때 평양에 그대로 남아서 북한건국 때 군사적 고위직으로 참여한다.
인민정치협상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서 노동상까지 지냈으나 결국 연안파 숙청 때 ‘장개석의 스파이’로 몰려 숙청당한다. 한반도 이념대결의 시대적 제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북한에서는 반당파로 몰린 것이다.
이렇게 민족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황포군관학교 및 조선의용군 출신들이 1945년 광복 이후에는 일부 남북한으로 갈라져 50년 한국전쟁 때는 서로의 전우들 가슴에 총을 겨누게 되는 비극적 운명으로 대결현장이 되기도 한다. 지금도 20세기적 냉전대결 모순이 분단상태로 대치되어 있다. 그러나, 21세기는 좌익진영의 자본주의적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 러시아 등 새로운 화해와 협력의 시대가 되었다.
평화적 사회주의와 자유적 자본주의가 유엔을 중심으로 폭넓게 합의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지금도 중국, 미국, 러시아, 일본, 4대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약소국이다. 역사적으로도 늘 주변 열강국들의 정치적 이해타산으로 식민지로 강점당하거나, 국토가 분할되는 등 칼질을 당해왔다. 약소국으로서의 군사적 물리적 불평등은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이 없다.
그러나 전 세계에서 유일한 단일 민족으로서의 확고한 민족성과 자주성은 여전히 강력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다. 그러한 민족정신이 오늘날의 IT 세계강국이 된 것이다. 21세기 세계성은 다양하다. 미국과 이라크의 대결에서 보듯이 약소국이라고 그렇게 단순하게 군사적으로 제압되는 게 아니다. 유엔의 존재와 권한도 그래서 더욱 강화되고 있으며 현재 유엔 사무총장도 반기문 한국인이 선출되었다. 다양한 많은 국가들의 존재가치와 인류 보편적인 세계성이 강화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