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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학철의 출생환경과 문학적 체험

김학철의 출생환경과 문학적 체험

그의 문학적 일생을 편의상 전반기, 후반기, 종반기로 크게 3기로 나누어 보면, 전반기는 1916-1945년까지 광복이 되어 서울로 귀국한 조선의용군으로서, 후반기는 1945-1980<해란강아 말하라> <20세기의 신화>로 대변되는 문화대혁명에 항거하는 저항문학가의 삶이고, 종반기는 1980-2001<격정시대>로 대표되는 중국작가협회 소설가로 복귀는 중국공민(소수민족 조선족)으로서의 회복이다. 크게 두 가지는 조선의용군 군인으로서의 삶과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가로서의 저항적 삶이다.     

金學鐵(본명 洪性杰 1916-2001)은 함남 원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에 큰 충격을 받아 1932년 보성고교 재학중인 16세 때 이미 항일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 1937(21) 중앙육군군관학교(횡포군관관학교 교장 蔣介石)에 입학하면서 당시 교관으로 있던 金枓奉, 韓斌(王志延), 尹世胄(石正)의 진보적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받아 평생 마르크스 주의자로서 신념을 갖게 된다.

그는 193519세의 나이로 상해임시 정부를 찾아 나선다. 沈云(沈星云 본명 沈相徽 훗날 조선독립동맹 서울위원회 조직부장)과 만나 義烈團에 가입한다. 石正(尹世胄)의 영도 아래 반일 지하 테러 활동을 하면서 李蘇民(일명 李景山 훗날 조선약업회사사장)과 친해진다. 이듬해 조선민족혁명당(전신義烈團)에 입당하면서 金元鳳(若山 훗날, 1947년 인민공화당 당위원장, 전신 조선민족혁명당)의 충직한 부하로서 인연을 맺게 된다. 상해 초기시절인 20세 때 조선혁명당의 김원종 편지를 가지고 임시정부 金九를 만나기도 하고, 중국 당대 문학의 대부인 魯迅을 이수산과 함께 만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특히 황포군관학교(13기특별6) 동창생으로서 조선민족혁명당 중앙본부가 있던 남경 花崗路로 시절부터 만년까지 친하게 지냈던 동료 중에는 李景山(李蘇民, 훗날 조선약업회사 사장), 文正一(본명 李雲龍, 훗날 중국 민족부 차관), 石成才(일명 張志民, 훗날 중국동북인민정부 주석, 高崗의 조선문제 담당비서), 胡一華(본명 李相朝, 훗날 인민군 부총참모장, 정전담판 북측 수석대표, 소련대사 등) 등이 있다.

이들이 전부 가명을 썼던 이유는 일본정부에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 학생들을 황포군관학교 군관요원으로 양성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항의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장인 蔣介石은 할 수 없이 조선인들을 퇴학시키는 척하고 이튿날로 다시 불러들여 중국식 이름으로 전부 고치게 했다. 그래서 성이 , , 이 많았으며, 본적도 전부 동북 3(요령, 길림, 흑룡강)으로 하고, 현주소도 조선민족혁명당 사무실이었던 漢口 華商街 15(漢口 辦事?)로 똑같았다.

1930년대 목숨을 걸고 함께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던 전우들 그리고 애국적 열혈 동료 청년들이 훗날, 중국, 한국, 조선으로 뿔뿔이 갈라져 이념적으로 대결하는 적이 되기도 했다. 특히 50년 한국전쟁 때는 남북한으로 나뉘어 옛 동지들의 가슴에 서로 총을 겨누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민족의 모순이자 시대적 운명이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교관은 4명뿐이었다. 그 중 김학철의 정신적, 사상적 스승이었金枓奉(白淵), 王志延(?斌, 미하일 ?), 石正(尹世胄)과는 1941년 하북성 胡家莊(太行山 시기) 전투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그리고 훗날, 한국 외무부장관이 된 王雄(본명 金弘壹) 교관이 있으며, 조선인 소대장도 단 두 명뿐이었는데 해방 후, 보안부대 사령관이 된 李益星과 또 하나인 崔慶洙는 상해일본경찰서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 자수하게 된 변절자가 되었다.

태항산 격전에서 석정 스승은 전사하고, 김학철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일본군에게 포로로 나가사끼 감옥소로 끌려가게 된다. 석정과는 35년 의열단 시절부터 41년 태항산 전투에서의 사별까지 약6년간 충직한 마르크스주의 제자이자, 조선의용군 부하로서 헌신해 왔던 것이다. 한 해 전 40년에 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조선의용군 전체가 화북 팔로군 소속으로 전환되어 그 또한 조선의용군 제2대 분대장으로 참전했다.

1941년 격전 속에서 그는 조선의용군추도가를 작사하여 (작곡 金容燮 일명 柳新 훗날, 사단참모장으로 전사) 동료 전우들이 쓰러져 갈 때마다 이 추도가를 불러주었다. 그 자신의 마지막 장례식 때도 그의 유언에 따라 자신이 작사한 이 추도가와 황포군관학교 교가 속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 그의 유골이 두만강에 뿌려졌고, 나머지 일부는 원산 행 동해바다 파도를 타고 그의 고향 선조의 땅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때 이 추도가와 <고향길> 등을 작사하였다. 또한 그는 선전부의 선전간사로서 전우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해 <서광>(38), <승리>(39), <등대>(41)의 연극 극본도 썼다. 崔采가 연출하여 격전지 진중에서의 전우들을 위로해 주기도 했다. <등대>가 문학가로서 그의 처녀작인 셈이다. 이미 1934(18) 보성고교 졸업 년도에 당시 <조선문단>에 소설 <타락자>를 투고했으나 퇴짜를 받은 이후 7년만의 문학적 재도전이다. 보성고교 사춘기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상화), <민중의 적>(입센)에게 문학적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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