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김학철의 문학] 조선의용군과 최초 빨지산 문학

   김학철의 문학-  조선의용군과 최초의 빨치산 문학    

1942년 그의 나이 26세에 일본 나가사끼 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총상 입은 다리를 36개월 간이나 치료받지 못하여 결국 절단하게 된다. 구더기가 허옇게 들끓는 곪은 다리에서 젓가락으로 구더기를 건져내면서도 그는 그 독방에서 민족적 지조와 사상적 신념을 지켜낸다. 특유의 낙천성으로 세상을 달관하면서 혹독한 고통을 극복한다. ‘유자명(훗날 상해임정 의원) 부대가 활약하던 상해와 남경에서는 항일 테러요원으로, 김원봉 부대의 무한시대에는 조선의용대 군관으로, 김두봉의 태항산 조선의용군 시절에는 최후의 분대장으로서 철저하게 항일투쟁을 하신 당신은 이렇게 가는군요.

그의 외아들 김해양은 이렇게 속으로 통곡하며 아버지 김학철의 마지막 21을 곁에서 지키며 일기를 썼다. 이 시대 한민족 독립 혁명가이자 실천적 사회주의 문학가인 김학철의 최후 현장 기록을 남긴 것이다

1945년 김학철은 감옥의 동지인 송지영(훗날 KBS 이사장)과 함께 서울로 귀환한다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항복시킨 맥아더 사령부의 정치범 석방명령으로 서울에 오게 된 그는 이무영 등을 만난다. 소설로서는 처녀작인 <지네>(건설주보 194512)를 처음 발표한다. 나이 30세가 된 이 해부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왕성한 작품활동을 한다. <균열>(신문학 창간호), <남강도구>(조선주보), <아아, 호가장>(신천지) 등 한 해에 10여편의 단편소설을 발표한다.

그리고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조벽암, 이태준, 김남천, 이원조, 안회남 등과 함께 이념적 동지로서 가깝게 지내며 문학 간담회도 활발하게 참석하는 한편 조선독립동맹(서울시위원)으로 좌익정치 활동에도 참여한다. 그러다가 194612월말 조직에서 파견한 간호사(훗날 부인이 된 金惠媛)와 누이동생의 부축을 받아 해주로 해서 평양으로 들어간다. 미국 軍政의 좌익 탄압작전에 평양으로 피신한 것이다.

다시 이듬해 로동신문 기자이며, 민족군대 신문 주필이 되자 중편소설 <泛濫>(문학예술, 조선문학예술총동맹 기관지)을 위시하여 <정치범 99> <선거만세> <콤뮨의 아들> 그리고 고골리의 <검찰관>을 번역하기도 하는 등 평양에서도 역시 활발하게 발표한다. 또한 작곡가 정율성과 함께 <동해어부>(48) <유격대전가>(48) 등 대형교향곡을 작사하기도 한다. 李泰俊, 金史良 등을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해에 金惠媛(본명 김순복, 경기도 인천시 부평)과 결혼한다. 진정한 사회주의 문학가로서 사실적 사회주의 붓질을 활발하게 한다.

고골리의 <검찰관>은 시나리오로 개편하여 황철 문예봉 등이 연출하기도 했으나 이유없이 중단되었으며 외금강휴양소장으로 밀려났다. 권력투쟁으로서 延安派 숙청이 극비에 진행되었다. 그리고 2월에는 외아들 金海洋이 부평에서 출생한다. 김일성은 어린 김정일을 데리고 휴양소에 수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1950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해 10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간다. 연안파 숙청이 강화되어 압록강 국경선에서 문정일(황포군관학교 동창생)의 도움을 받는다. 이듬해 1월부터 북경 중앙문학연구소’(소장 정령)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한다. 5210朱德海, 崔采의 초청으로 연변문학예술계연합회 주비위원회 주임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연변에 정착하게 된다. 魯迅의 단편소설집 <풍파>를 번역 출판하면서 자신의 <범람> 등을 중문으로 번역 출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듬해에 반년만에 위 연합회 주임직을 사퇴하고 이후 전업작가로 창작에만 전념하여 <해란강아 말하>(1954)를 발표한다. 내부적인 암투가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전 서울대)은 우리문학사에서 해방공간의 낯선 계보 등장에 김학철을 지적해 냈다. 김학철 작품을 우리 문학사 최초의 빨찌산 문학으로 규정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어 서울에 돌아온 그는 그해 <지네>(건설주보 12월호)를 소설로서는 처음 활자화가 된다. 처녀작인 셈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조선문학가동맹의 지도부였던 이태준, 김남천, 안회남 등의 전격적인 주목을 받았다. 한쪽 다리를 잃은 조선의용군 장교출신이 체험적 소설을 발표하자 소설평 간담회 등에서 특이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특히 구주 탄광출신인 안회남과 함께 서울 문단에 그 대단한 용감성과 함께 집중적인 화제가 된 것이다. 그러자 김학철은 이듬해 1년 동안에 <균열> <남강도구> <아아, 호가장> 10여 편을 폭발적으로 발표한다.       

이들 작품군이 최초의 빨치산 소설이란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병주의 <지리산>(1974)에서 김원일의 <겨울골짜기>(1987) 조정래의 <태백산맥>(1986)에 이르기까지, 김석범의 <화산도>(1986)에서 김석희의 <땅울림>(1988)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마침내 이태의 <남부군>(1988)에 걸치는 우람한 우리 문학사에 솟아오른 빨치산 문학의 족보는 실상 해방공간 속에 은밀히 돋아나 있었던 것이다. 저 조선의용군의 태항산 전투와 이를 형상화한 <격정시대>는 장지략의 <아리랑의 노래>를 훨씬 능가하였으며 또한 우리의 근대사 자체의 수정을 부가피하게끔 만들기도 한 것이어서”        

김윤식은 계속 말했다. ‘문학가동맹 소설부 간담회에서 <균열>에 대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이태준은 작가의 손아귀에서 넘어가지 않는 소설곧 르포르타주의 일종이라 본 것이다. 김남천은 너무 작위적이라 비판하였고, 이원조는 이 작품의 주제는 중간에 있다며 이태준과 김남천을 동시에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학철은 그를 뜨겁게 환영하는 서울문단을 홀연히 떠나 평양으로 간다. 그것은 미국 군정에서 좌파를 탄압한다는 이유이다. 나중에 남로당을 따라 문학가동맹의 임화, 김남천, 이태준 등 이 시기에 거의 다 월북한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