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의 역사의식과 시대정신
김호웅의 ‘우리문학의 산맥-김학철옹’ 에서 “우리민족 문학의 두 거목 김학철과 정판룡은 20여일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쓰러졌다. 이로써 우리문화의 한 시대가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그는 김학철 연구에 그 동안 집중해왔다.
“김학철은 상해에 와서 김원봉이 지도하는 반일 테러조직- 민족혁명당에 입당한다. 민족혁명당 기관지 <앞길>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돈 있는 일본인들을 습격하는 테러활동에 참가한다. (중략) 북경을 떠나 연변에 자리를 잡았는데도 ‘역시 아직은 밝히기 어려운 사정들이 있다’ 고 하는데 그 내막은 알길 없다. <해란강아 말하라>(54)와 <괴상한 휴가>(55)를 발표하면서 1957년부터 반당 반사회주의 독초로 지목되어 비판을 받아 무려 24년간이나 가혹한 시련을 겪게 된다. (중략) 그러나 그는 언제나 낙천적 사회주의자로 평생을 살아왔다. ‘밤 소나기 퍼붓는 령마루에서 래일 솟을 태양을 바라보며 살아온’ 파란만장의 일생을 문학세계에 옮겨놓는 일생이었다.”
장정일은 ‘그토록 강하고 그토록 부드러웠던-‘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이는 좋은 날 궂은 날 할 것 없이 우리 삶과 문학현장의 전초에 선 용감무쌍한 선구자였으며 고리끼의 소설에 나오는 단꼬처럼 자기의 심장을 꺼내들고 험난한 앞길을 헤쳐나간 밝은 홰불이었다. 그이는 로신의 현실직시와 비판반성의 현대적 사고방식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우상숭배, 몽매주의, 만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자유롭고 개성적이고 풍요로운 문학을 실천한 연변문단의 스승이고 동포문단의 기수였다.’
김학철은 ‘무죄를 선고하는 공판정에서의 발언’ 했다.(1980.12.15) 그러면서 그는 정명석이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의 죽음을 울부짖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얼마나 많은 반동(?)들이 비참하게 죽어갔는가.
“나는 일찌기 이 북간도 땅에 이렇게 긴 땅굴이 있으리라군 꿈에도 생각을 못했었습니다. 이 <반동>이라는 무시무시한 명칭으로 불리는 땅굴은 사람이 한번 들어가기만 하면 (중략) 24년 동안이란 고난의 길 걷기를 간신히 끝마치고 굴 어구에 와 닿았습니다. 이 시각에 북경의 특별법정에서는 력사의 죄인을 심판하고 있습니다. 사람잡이를 업으로 삼는 인간 백정들의 말로에는 수치스러운 멸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문화대혁명의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한 <20세기의 신화>로 옥고를 치른 후 역사는 다시 그를 법정으로 불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런 사실들을 김학철의 임종 장면 중에 확인하여 취재하던 <말> 잡지의 이종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써냈다.
“삼엄한 중국의 ‘혁명법정’ 온몸 꽁꽁 묶이고 입까지 더러운 걸레로 막혔으되 외다리로 꼿꼿이 허리굽히기를 거부한 사내가 있었다. 당시 반 우파분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재판정에서 예외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허리를 깊숙이 굽혀야 했다. “그는 사회주의라는 이상에 대한 신념과 시대적 불의와의 투쟁으로 일관된 삶을 살았다. 그는 민족을 억압하는 외세는 물론 이승만, 김일성, 마오쩌둥 등 냉전의 시대적 특질을 체현한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당당히 맞서 싸웠다. “
‘영웅은 限命을 안다’ 며 끝내는 구차한 생명연장 치료를 거부하고 지하의 석정 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사제지간인 두 사람의 민족적 신념과 사회주의 철학사상, 그 시작과 끝이 하나로 연결된 셈이다. 그곳에서 그의 유족들이 그 동안 몰래 숨겨왔던 ‘조선의용대 창설기념’ (중국 漢口. 1938.10.10)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약63년 전, 이 역사적 기록사진 속에서 그는 그 사진 속의 전우들 이름과 별명까지 기억해내어 세상에 밝혀주었다. 85세 된 노인의 놀라운 기억력은 한국독립운동사에 또 하나의 빈칸들을 채워준 것이다. 당시 역사적 진실들은 이렇게 해서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