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한국가을문학] -수필 - 푸른민달팽이와 웜뱃(wombat) / 백선욱 수필가

푸른민달팽이와 웜뱃(wombat)

 

백선욱

오랜만에 올빼미 생활로 돌아왔다. 하지만 밤은 물론 낮에도 잠을 잘 수 없으니 불면의 올빼미가 맞겠지. 청탁받은 원고가 마무리되었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맞는다. 푸른 빛의 새벽이다. 작업 중 혼탁했던 생각의 찌꺼기들이 신선한 공기에 휘발해버린다. 이런 때면 늘 맑아진 머리에 슬며시 따라 들어오는 생각이 있다. 무슨 일이든 주어진 일이 잘 마무리되면 성취감에 만족스러워야 하는데 왜 늘 허무한 감정이 밀려드는 것일까.  


하나의 일을 마치면 일종의 포스트 단계라고 할까. 일의 완성까지 부족했던 것들과 그로 인해 체득한 지식이나 요령이 정리된다. 대부분은 빈약한 지식이나 부족한 정보에 가난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다행히 부족한 정보는 엄청난 지식의 보고가 눈앞에 있기에 손가락만 조금 바쁘게 움직이면 쉬운 보완이 가능하다.

남은 것은 스스로에 대한 부족함. 미완의 결핍감은 한동안 떠나지 않는다. 일은 경험치와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나의 내부에 자리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은 가장 큰 적이며 어려운 상대임을 깨닫게 해준다. 특히 내가 알고 있는 것, 잘 안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사실과 다를 때는 정말 혼란스럽다.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의 일이다. 학교에서 모든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고 배웠는데 어느 날 물 밖에서 숨을 쉬는 물고기를 보고 호들갑을 떤 적이 있다. 망둑어였다.

어른들은 무심하게 망둑어는 원래 그렇다고 했다. 세상에 원래 그런 것이 어디 있을까. 그렇다면 교과서에 쓰여 있는 모든 물고기는 아가미로 숨을 쉰다는 정의는 틀린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제대로 알려 준 사람은 없었다. 결국 어떤 것이든 예외나 특별한 경우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해답은 엉뚱하게도 자연에서 얻었다. 푸른민달팽이(Elysia chlorotica)와 웜뱃(wombat)을 소개한다. 우선 푸른민달팽이는 동물과 식물의 중간자다. 새로운 개념이라 망둑어를 처음 보았을 때만큼이나 당혹스러웠다. 푸른 민달팽이는 바다에서 해조류를 먹이로 하는 생명체다. 형태도 나뭇잎과 비슷해서 해조류 속에서 위장술도 뛰어나다.

특이하게도 섭취한 조류(algae)의 엽록체를 소화하는 대신 자신의 세포 안으로 이동시켜 광합성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먹이사슬 최하위의 푸른민달팽이는 스스로를 지킬 딱딱한 견갑도 없이 생존을 위한 위장술과 환경적응을 위한 몸의 변이까지도 허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동물이며 동시에 식물인, 불과 2~3cm의 민달팽이의 삶에서 우리네 세상살이가 읽힌다.  


얼마 전 호주에서 산불로 남한 면적 이상의 숲과 농지가 불탔다. 석 달 이상의 화재는 10억 마리 이상의 동물을 희생시키고 진화되었는데 여기서 동물들의 영웅이 탄생했다. 웜뱃(wombat)이다. 웜뱃은 코알라, 캥거루와 함께 호주를 대표하는 귀여운 동물이다. 오소리와 비슷하며 몸의 길이는 70~120cm 정도로 꼬리와 귀는 짧고 배에 새끼주머니가 있다. 초식동물인 웜뱃의 강한 발톱과 설치류를 닮은 앞니는 긴 굴을 파기에 적합하다.

밤이나 어스름할 때 활동하지만, 시원할 때나 흐린 날에는 낮에 나오기도 한다. 웜뱃이 호주의 화재 당시에 놀라운 행동을 보였다. 불길의 위험에 처한 작은 동물들을 자신의 굴로 인도해 피신시켰다. 사람도 선뜻하기 힘든 행동으로 다른 동물들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 몽실하게 생긴 웜뱃은 요즘 호주인들의 사랑을 잔뜩 받고 있다.  


열등하다고 여겨온 작고 보잘것없는 생명체,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새삼 위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스스로를 변화시켜 가장 낮은 곳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적극적인 생존 방법을 터득한 푸른민달팽이, 그리고 같은 동물 친구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실천했던 웜뱃의 행동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지식과 정보는 과학기술과 계측기구의 발달로 그동안 알지 못하던 세계를 규명하고 있다. 잘못된 정보는 수정되고 새로운 정보는 저장된다. 고착된 사고로는 퇴보만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람을 대하거나 사물을 보고 인식하는 것은 틀에 박힌 고정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이미 알아버린 대상에서는 새로운 모습을 찾아내기 어렵다.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사소한 일일지라도 선입견을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은 조금 더 내게 열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을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더할수록 더 절감하고 있다. 세월과 아집이 만든 견고한 선입견은 점차 거추장스러운 애물단지가 되어 나의 내부에서 양보도 없이 웅크리고 있다.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가는 자신에게 자구의 메시지를 발신한다. 어떻게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