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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 혼돈의 계절 - 소설가 이성수

[연작 소설] 소설가 이성수

- 만원 승강기-

하늘이 바다처럼 일렁거리자 귀찮은 표정의 가로수가 신경질을 내며 연신 낙엽을 떨어낸다. 푸르렀던 나뭇잎이 갈색으로 변해 억척스럽게 매달려보지만 작정한 세월의 섭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어 무연히 웃는다. 가파른 산비탈이 갈색 이파리를 떨어내고 바닥에 드러눕는다.

탱크로 쳐들어와 십 년을 훨씬 넘게 눌러앉아 큰소리치는 사내의 새까만 색안경에 비위를 맞추느라 사람들이 부산을 떤다. 눈을 부릅뜬 총구들이 모습을 드러내 지나는 행인의 눈초리를 사로잡는다. 수많은 사람들은 말이 법인 사내의 눈초리를 살피느라 바쁘다. 그의 가려운 곳을 찾아 긁느라 날밤을 새가며 이런저런 일들을 꾸며내고, 눈치도 계산도 없는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아넣고는 눈을 가리느라 낭창거리는 회초리로 채찍질을 일삼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했던가? 주변을 살피며 소곤거리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눈치 빠른 자들이 호탕하게 웃는다. 그들은 점점 욕심이 커지고 겁이 없어져 이것도 내 것이요 저것도 내 것이오하며 심통을 부린다. 남의 재산뿐 아니라 양심과 신념까지도 자신의 것이라며 억지를 부렸다. 행여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고 억울한 마음이 생겨 눈이라도 크게 치켜떴다가는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라서 두고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잔뜩 긴장한 초병이 눈동자의 초점을 한 곳에 모아놓고 로봇처럼 움직였다. 까만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이 이어폰을 귀에 꽂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래위를 쏘아보자 스산하게 부는 바람조차 멈칫거린다. 아마 높은 담장 안에서 눈을 부릅뜨고 쏘아보는 사내의 눈빛에 겁먹은 바람이 눈치를 살피느라 그런 것 같다.

우뚝 솟은 북악산 봉우리의 정기가 찢어진 눈빛으로 위협하며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숨죽여 쉬는 숨소리까지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겨우 추슬러 놓은 몸짓이 저절로 움츠러들고 어깨가 수그려져 쪼그라든 아버지의 겁먹은 눈빛이 저절로 떠오른 김수곤이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진저리가 쳐지는 터라 애써 어깨를 펴고 가슴을 내밀어 어금니를 깨물어 본다.

! ……, 김 씨 아들이구나.”

박영달은 김수곤을 알지 못한다. 간혹 찾는 고향이지만 마을 뒤쪽의 비탈진 길을 한참이나 올라가서 아무렇게나 자리 잡은 오두막집에 사는 김수곤이니 더더구나 알 리가 없다. 그래도 아는 척 한 마디 하는 것은 조카인 박준영의 부탁 때문이다.

박영달은 김수곤 아버지인 김기옥보다 두 살이나 손아래다. 김기옥은 고향 마을에서 살 때는 마을의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천애고아나 다름없었다. 박영달은 그런 김기옥을 종 부리듯 하면서도 함께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그래서 김기옥을 잘 안다. 조카인 박준영이 졸라대서 만나 보는 것이지만 마땅찮은 표정이다. 눈치 빠른 김수곤은 박영달의 의중을 금세 읽어냈다.

안녕하십니까? 맞습니다만 저는 한국 법대에…….”

소파에 앉아서 찻잔을 들다가 집무실로 들어서는 김수곤을 보는 둥 마는 둥 슬쩍 한번 쳐다보고 나온 첫마디였다. 박영달의 한 마디는 김수곤의 기를 단번에 꺾어놓았다. 반겨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대놓고 무시하리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박준영에게 몇 번씩이나 고개를 숙여서 겨우 얻은 기회다. 마음 같아서는 되돌아가고 싶다. 굴욕감으로 심장이 부르르 떨린다. 그렇지만 박영달의 반응 따위가 무슨 대수냐 진가를 보지 못해서 나온 반응이니 몇 마디만 더 주고받으면 제대로 봐줄 것이다.

김수곤은 마음을 다스리느라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어보았다. 헌데 그는 그런 김수곤의 속을 훤히 들어다 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색을 해서 쐐기를 박았다.

그래. 쟤한테 많이 들었다!”

조카인 박준영의 부탁이 있어서 혹시나 손발로 부릴 수가 있을까 해서 만나 봤지만 눈빛의 독기가 심상찮다. 무척이나 똑똑하고 명석해 결코 손발 노릇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다. 보나마나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꼴이 되므로 더 이상 살펴 볼 것도 없다. 입맛에 맞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볼모로 잡아놓고 이용할 작자들만 해도 부지기수다. 뻔히 알면서도 이런저런 계산으로 안달하는 자들이 줄을 서 있는 형편이다. 결코 도움이 될 성 싶지 않은 일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다.

박영달의 시선이 박준영에게 향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무척 잘난 친구라서 삼촌이 흡족해할 것이라 여겼다. 늘 괜찮은 사람이 없느냐고 묻곤 했던 삼촌이라서 내심 칭찬을 기대했던 것인데 뜻밖의 반응을 보이는 삼촌이다.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는 박준영에게 사람을 그렇게 볼 줄 모르냐?’는 핀잔을 주는 표정을 과장되게 지어보이고 출입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계획에 없던 박영달의 행동이라서 두 사람을 안내했던 좀 전의 여비서가 차질이 생긴 듯 부산스럽다.

바깥에서 볼일이 있어 나가봐야 해. 오랜만에 왔는데 그렇게 되었구나. 내가 없더라도 놀다가 가거라.”

박영달은 돈을 지갑에서 꺼내어서 세어보지도 않고 박준영에게 쥐어주며 어깨를 두드렸다. 김수곤을 대했던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사랑스런 조카를 대하는 삼촌의 모습이다. 늘 그래 왔듯이 쥐어준 용돈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삼촌을 배웅하러 영달을 따라 나서는 박준영이다.

어이, 장비서! 준비됐나?”

. 대기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가면 되는 거야?”

현관에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박영달은 조카의 어께에 손을 올리고 잡아끌어서 비서실을 지나 복도로 걸어 나갔다. 자신을 만나러 온 김수곤에게는 눈길조차도 주지도 않고 그의 기운마저도 집무실 바깥으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겨우 한 마디밖에 못했다. 아니, 말을 꺼내보지도 못했다. 자신이 들었던 것하고는 너무나 다르다. 아버지의 말로는 겨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다가 군인이 되어 출세를 한 사람이라 했다.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말을 고향 어른들에게서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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