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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문학의봄 가을호 통권 제64호(발행인 이시찬)/류시호 논설위원

노을과 비둘기를 좋아하여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석양(夕陽)의 화가 윤중식과 길상화(吉祥華) 자야

류 시 호 / 시인 수필가

성북구 구립미술관의 한국 근현대 미술사의 주요 작가인 윤중식 화가 10주기 추모 전시회를 갔다. 윤중식은 이중섭 화가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근대 서양화가이다. 짧은 생애를 살다 간 이중섭과 달리 윤 화가는 100세까지 살면서 근대사를 함께하며 아픔과 기쁨을 지켜본 화가이다.

성북구립미술관은 윤중식 작가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생각하는 회향’(懷鄕) 전시회를 열고, 그의 가족이 미술관에 기증한 작품 500점도 공개했다. 성북동은 윤 작가가 1963년부터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년이나 살았던 제2의 고향이다. 노을과 비둘기를 좋아하여 '석양의 화가'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윤중식은 강렬한 원색과 거친 형태가 특징인 '야수파' 화풍의 화가인 프랑스의 앙리 마티스를 특히 좋아했다. 일본 유학 중 마티스 제자에게 그림기법을 배우고, 야수파, 표현주의, 자연주의에 심취하여 우리나라의 향토적 서정미와 색채미가 충만한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윤중식 화백은 "붉은 태양이 서쪽 산으로 기울어질 때면 석양은 찬란한 빛과 신비의 세계로 물들고 다양한 변화에 가슴마저 울렁거리게 된다."고 말했다. 오렌지와 노랑, 그리고 주홍색은 윤중식 화풍의 특징이며 실향민으로서 애틋한 감정을 지니고 살았다.

이어서 성북동의 사찰 길상사를 방문했다. 이곳은 원래 청운각, 삼청각과 함께 서울의 3대 요정으로 불린 고급 요릿집 대원각으로, 이 요정을 운영하던 김영한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 철학에 감화되어 1천억이 넘는 건물과 땅을 시주하면서 사찰로 태어났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 눈은 푹푹 나리고 /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 나탸사가 아니 올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 이 시는 백기행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자야는 사랑하는 백석을 평생 그리워하며 외롭게 살았다. 그래서 법정 스님은 길상사 내 吉祥華(법명) 김영한의 공덕비와 함께 이 시의 시비(詩碑)를 함께 세웠다.

자야(子夜) 김영한의 연인 백석(白石) 백기행 시인은 평안북도 정주출생으로 조선일보와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근무했다. 자야는 백석이 당시(唐詩) 선집을 읽고 지어준 호이다. 백기행은 방언을 즐겨 사용하면서 향토적인 서정의 시들을 발표했는데, 백석의 나이 26, 자야의 나이 22살 함흥에서 만나 뜨거운 사랑을 했다. 그러나 백기행이 부모님 지시로 선을 보고 결혼을 한 것을 알고, 김영한은 서울로 이사를 했고 백석도 서울로 직장을 옮겨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그런데 부모님의 성화에 또다시 결혼하고 자야를 찾아왔으며, 백석이 만주로 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같이 가지 않았다.

팔십 평생 한 남자를 그리워하며 산다는 것은 멋진 순애보이다. 특히 중앙대학 문학평론가 백철 교수는 신문 칼럼에서 한국 시사(詩史)에서 시인 백석을 소월 다음으로 가는 귀재(鬼才)’라고 평했다. 길상사 나무 그늘에서 백석과 자야의 가슴 아픈 사랑에 공감하며 잠시 고독한 시인이 되어 보았다. 사람들 모두가 나이가 들면 어릴 적 살던 고향을 그리워하며 추억을 먹고 사는 것 같다. 코로나로 지친 나날 야수파 화풍의 윤중식 화가 전시회에 가서 고향도 느껴보고, 길상사에 들려서 백석과 자야의 사랑을 찾아보고 즐거움도 얻자. P.S. 이 원고는 2700자이지만 지면 관계상 1700자로 올림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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