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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 혼돈의 계절 - 이성수 소설가

이성수 소설가의 장편소설 - 혼돈의 계절 -3-

신혜경은 농담하며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아놓고 있었다. 한데 김수곤이 공손한 자세로 사과를 하는 데도 금세 표정이 굳어지고, 불편한 심기를 온몸으로 애써 표현하느라 대꾸조차 없었다. 박준영은 영문을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박준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김수곤을 쳐다보자 김수곤이 꺾일 대로 꺾여 기가 빠진 말투로 얘기했다.

물을 마시고 싶어서 신 선생께 부탁드렸거든.”

미스 김이 담당이야. 신 비서님은 높은 분이야 사과드려.”

박준영의 말대로 한 번 더 사과했다. 신혜경은 대답 대신, 조금 전의 불쾌한 기분을 털어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굳어진 얼굴을 펴서, 농담했다.

준영 씨는 미스 김만 좋아해요! 나도 여잔데.”

김수곤이 이젠 됐다 싶어서 중간에서 끼어들었다.

조금 전에 제가 누구냐고 물어보셨지요? 저는 이름이 김수곤이고 한국법대 삼학년에 재학하고 있으며…….”

김수곤은 잇따른 무시로 무색을 당하여 움츠러들어 있었다. 안쓰러운 마음이 생겨 태도를 누그러뜨려 본 것이지만 그 틈을 약삭빠르게 파고드는 김수곤이 역겹게 느껴져서였다. 아직 앳된 티가 철철 흐르는 새파란 어린 학생이었다.

까만 뿔테 안경 너머에서 뿜어내는 눈빛이 웬만한 어른보다 더 끈적거리고 있었지만, 세상의 때가 묻어서는 안 될 나이임은 분명했다. 얼굴에서 비린내가 펄펄 나고 있었다. 뭐가 급해서 어른 흉내를 내려 하는가.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가 있다고 했다.

벌써 저러니 손에 권력을 쥐게 되면 어찌 될까 싶다. 섬뜩함마저 느껴지는 김수곤의 행동이었다. 역시 박영달이 사람을 제대로 본 것이다. 비위가 상한 신혜경은 얼굴에 비웃음을 담고 김수곤이 하려던 말을 대신했다.

다 알고 있어요. 금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셨고요. 조금 있으면 사법연수원에 들어가 연수를 받겠죠?”

대놓고 무시하는 신혜경이 무척이나 싫고 미웠다. 더군다나 처음 보는 그녀가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녀 앞에 마치 발가벗겨져서 서 있는 기분이 드는 터라 더욱더 싫고 초라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위를 건드려서 좋은 것이 없다.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잘만 이용하면 이곳을 수시로 드나들 수가 있다. 제집 드나들 듯하고 있는 박준영이 아닌가. 박준영처럼은 아니더라도 이곳에 드나들 수만 있다면 박영달이 어찌 나오든지 간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신임을 얻을 수가 있다. 필요하다면 박영달이 토해놓은 것까지도 기꺼이 먹을 작정이다. 그래야 대단한 권력을 등에 업고 출세의 가도를 달릴 수가 있다. 그러려면 신혜경의 마음을 얻는 것은 첫 관문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 제 후배가 되는 것 같은데요?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것만 해도 대단한 일입니다. 잘 알겠지만, 이곳에 오려면 신원 조회를 해요. 아무나 올 수가 없지요. 그러니 준영 씨 덕에 출세한 거예요. 호호호.”

신혜경의 억지웃음이 무척 서늘했다. 차라리 조금 전처럼 대놓고 무시하는 편이 낫다. 말투에서 표정에서 쏟아내는 냉랭함에 굴욕이 느껴졌다. 도대체 파고들어 볼 여지가 없었다. 그런데 다행히 입으로 자신이 선배라고 했다. 실마리를 찾아낸 느낌이었다. 반색하며 그녀에게 또다시 말을 붙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학번이?”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신혜경은 더는 비집고 들어갈 틈을 없애고 있었다.

그건 알 것 없고. 준영 씨에게 고맙다고 하세요.”

그렇다. 지금 소파에 몸을 부려놓고 여유롭게 앉아있는 박준영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박준영이 아니었다. 박준영은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의 위세로, 아니 삼촌의 위세로 우등상장을 휩쓸고 교장 선생에게조차도 특별한 대우를 받았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부러워하거나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비록 어른들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는 그였지만, 또래들 사이에서만큼은 너무나 달랐다. 자신의 그늘에 가려져서 제대로 된 행세는 물론 존재조차도 희미했기에 부럽지도 않았고 대단해 보이지도 않았다.

또 수재들이나 진학하는 명문 중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던 김수곤과 달리 그렇고 그런 중학교를 낙방하고서도 김수곤과 함께 학교에 다니는 박준영이지만 별것 아니라 여겼다.

한데, 박준영은 예비고사에 낙방했었다. 누구든지 예비고사를 통과하지 못하면 정규대학에 진학할 수가 없다. 모두가 알고 있으며 지키지 않고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국민들은 모두가 그렇게 알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서 어찌해 볼 엄두조차도 내지 못했다. 그런데 박준영은 달랐다. 버젓이, 그것도 일류대학을 다니고 있엇다. 그 누구에게나 예외가 없는 대단한 법이었지만 박준영에게만큼은 아무것도 아닌 몇 줄의 글자에 불과했다.

비로소 박준영의 존재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잘나고 똑똑해서 장래가 촉망되는 자신을 무시한 사람은 여태껏 없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며 모두의 기대를 한껏 받고 자랐다. 동네 머슴이나 진배없이 대하는 아버지와 달리 너무 다른 사람들의 태도여서 죽어라 뛰고 달리면 되는 줄 알았다.

사법고시를 합격만 하면 저절로 길이 열리고 큰 권력이 생기는 줄 알았다. 모두가 그리 말했기에 그러는 줄 알았다. 한데 박준영의 존재는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죽을힘을 다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기에 죽기보다도 싫었던 자존심을 몇 번씩이나 꺾어서 이곳에 왔다.

역시 박준영은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서 떡 버티고 있는 배경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력을 다하더라도 갖기 힘든 것들이다. 그 대단한 것들을 이미 가져버린 박준영이라서 마치 거인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정말 그렇군요. 선배님.”

맞장구를 치자니 죽을 맛이다. 결코,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렇지만 참아야 한다. 박영달을 또다시, 아니 몇 번이고 더 만나야 한다. 벌써 자신에게 영감님이라 부르며 머리를 조아리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일개 비서일 뿐인데 자신을 우습게 알고 있다.

말로만 들었던 이곳의 위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선배라는 것은 끈이 될 수 있고 잘 만하면 비빌 언덕이 될 수도 있다. 무척이나 쌀쌀맞은 반응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곤은 납작 엎드려 보았다.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선배님!”

……?”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표정으로 준비실에서 나오는 미스 김을 향해 대답 대신 지시를 했다.

미스 김! 준영 씨에게 커피 갖다 드리세요!”

신혜경의 냉랭함에 머쓱해져 버린 김수곤이라서 빳빳하게 세웠던 눈빛을 아래로 떨어뜨려서 소파로 돌아가더니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박준영은 여유가 만만하고 거침없었다. 마치 자신이 근무하는 사무실이라도 되는 양, 커피잔을 손에 들고 사무실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사무실 직원들과 거리낌도 없이 농담하며 껄껄 소리를 내서 웃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수곤아 가자!”



박준영은 커피를 다 마셔버리고 건네는 말이었다. 돌아가자는 박준영의 말이 둔탁한 망치가 되어 뒤통수를 내려쳤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사무실에 신혜경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누구라도 좋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데 아무런 소득도 얻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대로 맥없이 물러설 수는 없다. 어쨌거나 눈도장이라도 찍어야 할 것 아닌가. 아직도 표정이 굳어있다. 그렇더라도 어쩔 수가 없다. 김수곤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신혜경에게로 향하자 그녀는 고개를 일부러 돌려서 딴청을 피우기에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수곤은 책상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허리를 깊숙하게 굽히고 손을 내밀었다.

다음에 올 때는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선배님.”

하지만 김수곤의 손은 끝내 잡아주지 않았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억지스럽게 말을 받아 줄 뿐이었다.

, ……. 잘 가세요.”

내민 손이 부끄러워서 모멸감이 밀려와 핏대가 곤두섰다. 인일시지분 면백일지우(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라 하지 않던가. 한순간의 분함을 참으면 백일 동안의 근심 걱정을 면할 수 있다고 했다. 평소 머릿속에 담아두었던 옛 얘기를 가슴으로 읽어보았다. 마음이 금세 바꾸어 졌다. 그래도 다행히 아닌가. 비록 신혜경이 손을 잡아주지 않았지만, 대꾸는 해 주었지 않은가. 큰 권력을 등에 업는 일인데 이깟 수모가 무슨 대수인가.


김수곤은 박준영의 독촉으로 길고 복잡한 지하의 통로를 지나서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동쪽 대문을 빠져나왔다. 문턱이 닿도록 드나들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며 대기해 놨던 승용차를 타고 자신의 집으로 떠난 박준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비탈길을 터덜거리며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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