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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소설] 혼돈의 계절 - 이성수 소설가

이성수 소설가의 장편소설 "혼돈의 계절"을 연재하며
여보. 내가 알아서 할 건데, 바쁜 양반이 별걸 다 신경 쓰시네요.”

머리? 미장원에서 했소?”

미장원에 맡기면 간단히 해결될 일인데도 한 시간 동안이나 씨름을 했다. 자수성가한 승희 아버지는 허례허식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런 사람이 평소와 너무 다른 얘기를 하는 터라, 제대로 믿어지지 않아서, 저절로 반문이 나왔다.

미장원이오?”

그러지 말고 지금이라도 미장원으로 가! 그리고, 승주 엄마! 나갈 때 뭐 태워 보낼 거야?”

평소보다 목청이 높으며 말투가 달랐다. 그럴 뿐만 아니라 말하는 어법도 달랐다. 무척이나 들떠있는 남편이라서 승희엄마는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

승희 아버지는 마음이 급했다.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한량없이 꾸물거리는 것 같아서 답답했다. 어찌 되고 있는지 확인해 보기를 잘했다 싶었다.

내 생각이 짧았어. 당신 올라갈 때 내 차를 올려보내는 건데…….”

김수곤은 전화를 걸어와서 수시로 안부를 물었고 고향에 내려올 때마다 문안 인사를 와서 두둑한 용돈을 받아 챙겼었다. 승희아버지도 고향 집 살림을 도맡아 보살펴 주며 수곤의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겨우 중학교 일학년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십여 년 동안이나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김수곤을 자신의 친아들보다도 더 믿고 기대하며 공을 들였다. 김수곤은 똑똑하고 영리하니만큼 승희 아버지의 속셈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뜻에 따르지 않을 생각이라면 큰 빚으로 여겨지고 있을 만큼 지나친 호의가 분명했다. 헌데도 그 호의를 당연시 여겼고 당당하게 받아들인 김수곤이었다.

그랬던 그가 변했다. 사법고시 발표가 있고 나서부터였다. 문안 인사는 고사하고 안부 전화 통화조차도 끊어진 지 오래였다. 당연하게 여기며 받던 용돈도 이제는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받지 않았다. 합격했다고 동네 축하 잔치를 주도하려다가 그만두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대가며 죽기 살기로 반대를 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일로 이런저런 얘기들이 흘러나와 구겨질 대로 구겨진 체면이었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김수곤의 변해버린 태도와 행동을 보면, 다 된 밥에 콧물을 빠뜨린 것이 분명했다. 한쪽 가슴이 무너져 내려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스려도 가슴은 텅 비어있었다. 밥을 먹어도 술을 마셔도 뱃속이 공허했다. 추운 것인지 더운 것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십여 년을 들였던 공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아서 기운을 차릴 수가 없다. 한데, 데이트 약속이 잡혔다. 승희 아버지는 꺼져가는 불씨가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며칠 전부터 들떠 있었다.

버스 타고 어쩌고저쩌고하지 말고 아예, 택시를 대절 해 버려!”

그는 기름값이 아까워서, 승용차를 세워놓고, 버스를 타는 일이 허다했다. 지금의 재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으로 일구어냈다. 그 누구의 털끝만 한 도움도 없이 오로지 성실과 근검절약으로 일구어 놓은 큰 재산이다. 힘들이지 않고도 돈을 벌 수가 있었지만 그러지도 않았다. 오로지 피와 땀으로 재산을 모았다.

낫 놓고 자 정도나 아는 무식한 사람이었지만 많은 경우를 생각하느라 일부러 어려운 길을 택하여 걸었다. 그의 행적은 올올이 가족들에게 교훈이 되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도 있고 낭비를 한다고 해도 하등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가족들은 항상 어렵던 과거의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자신에게 여태껏 보여주었던 남편의 조치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말이다. 더군다나 남편의 목소리를 들떠서 흥분하고 있었다.

정말 미장원도 가고 택시를 대절 해도 돼요?”

내가 언제 농담하는 것 봤어. 허허…….”

그렇다. 우스갯말로라도 사치를 한다거나 낭비를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자신이라는 것이 깨달아지는 터라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신이 시키는 대로 미장원도 가고 택시도 대절해요!”

못 미더워서 하는 말이 아니다. 풀 죽어 있던 남편이 기분이 되살아나 좋아하는 터라서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하는 말이었다. 남편이 시키는 일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더더구나 시키는 대로 해서 낭패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하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편안하고 기분 좋은 데이트가 될 것이다. 진즉부터 영감으로 대접받는 미래의 사위인 김수곤의 체면에 걸맞기도 하다. 그 무엇보다도 그의 마음이 변치 않도록 붙잡아 두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언제나 틀림이 없는 남편이라서 더더구나 믿음이 생겼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시간 없으니까 빨리빨리 해! 허허허.”

전화를 끊었지만 쉽게 믿어지지 않는 엄마다. 마치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떠서 승희를 쳐다봤다.

엄마. 미장원은 뭐고 택시 대절은 뭐야?”

특히 허례허식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아버지다. 그런 아버지가 하는 얘기라서 아버지의 기대에 감정이 이입되어 저절로 나온 물음이다.

미장원에 가서 화장 다시 하라 그러시고, 버스 타고 다니지 말고, 택시를 대절해 다니라고 하신다!”

엄마! 정말 그러라 섰어?”

아버지의 응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잘 안다. 자식의 행복을 위해 애쓰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소신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쳤다. 차갑고 계산적인 김수곤을 놓고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이 내키지 않는다. 똑똑해서 장래가 촉망되는 것 외에는 마음에 드는 구석이 별로 없다. 특히 사람 냄새를 풍기지 않는 그였기에 더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동안 아버지는 항상 바른 판단을 했다. 믿음을 주었다. 무척이나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런 아버지가 몇 년씩이나 공을 들이는 일이다. 승희는 뜻에 따르는 것이 효도라 생각되어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한 시간 동안이나 매만졌던 화장과 머리를 미용사에게 맡겨 놓자, 금세 만족스럽게 고쳐 놨다. 역시 돈이 좋긴 좋았다. 매이 퀸에 뽑히는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지만 그다지 외모에 관심이 많지 않다. 외모를 가꾸려면 돈을 들여야 하는 것이라서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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