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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작 소설] 혼돈의 계절 - 이성수 소설가

"혼돈의 계절" 이성수 소설가의 장편 소설을 이어가며
(계 속)
사실 따지고 보면, 법대에 진학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정병기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공부만 열심히 했었다. 고민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런 자신이라서 되돌아보는 중이다. 나름대로 고민이 많은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은 아버지라서 야속하다.

…….”

침묵으로 반항하는 아들에게 화가 난 아버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태껏 반항을 모르던 막내아들이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묵묵히 따라주었던 막내아들의 반항이라서 화가 더 치밀었다.

당신도 참, 병기가 어린앤가요? 저도 무슨 생각이 있겠지요. 여태껏 공부하느라 힘들었는데 이젠 숨 쉴 틈도 있어야지요.”

옆에서 지켜보던 정병기 어머니가 역성을 들고 나섰다. 그러자 그녀에게로 화살이 돌아갔다.

생각은 무슨! 제 친구가 어떻게 하고 돌아다니는지 보면서도 저러고 돌아다니는데……. 생각이 있다고!”

김수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요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느라 바쁘다. 뭐가 아쉬워서 저러는가 싶었지만 그러는 친구가 안쓰러워서 도와주려는 생각으로 얘기를 꺼냈던 적이 있었다. 정병기 아버지는 그 얘기를 빗대서 탓하고 있었다.

당신이 치마폭에 감싸니까 세상 물정을 모르는 거야. 공부만 잘하면 되는 줄 알아? 저렇게 연약한 놈을 어디에 써?”

아버지의 언성이 점점 높아지자 어머니의 목소리가 자라목처럼 쑥 들어가며 떠들다 들킨 초등학생이 되어 꾸중까지 들었다. 그러자 정병기 아버지는 흥분을 누그러뜨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정병기를 타일렀다.

나는 네 친구 행동이 결코 올바르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애가 저렇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은, 목표가 있어 저러는 거야. 물론 한직으로 돌다가 변호사 개업하면 보통 사람들 보다는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보통 사람처럼 적당히 잘 살려고 힘들게 공부하는 바보는 없다……. 나도 네 마음을 잘 안다. 하지만 경쟁은 이제부터야! 못난 사람은 못난 사람끼리 경쟁이 있고 잘난 사람은 잘난 사람끼리 경쟁이 있어. 그래서 항상 긴장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야.”

…….”

왜 대답이 없어?”

…….”

내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니?”

맞는 말씀인데요. 숨도 쉬면서 살아야 하잖아요.”

정병기는 불호령을 무릅쓰고 말대꾸했다. 그런데 정병기 아버지는 되레 기분이 좋아지며 표정이 밝아지고 있었다. 지금까지 시키면 시키는 대로 생각도 없이 무조건 따르는 것만 같아 염려가 많았다. 또 불만이기도 했다. 자기 생각을 분명하게 밝히며 주장하는 아들이라 병기의 아버지는 안심이 생기며 기분이 좋아졌다.

너만 힘든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힘들 때는 쉬어가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닌 때가 많다.”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출세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네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욕심이 있어야 뭐라도 이룰 수가 있다. 성취감을 느끼면 행복해지기도 하는 것이니 한쪽으로만 생각하지 마라.”

정병기는 처음으로 마주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항상 엄하게 생각되는 아버지라서 마주 앉는 자체가 부담스러워서 묻고 답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렇게 개방적일 줄을 미처 몰랐다.

 

윤승희 어머니가 현관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윤승희가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나 들어올 것으로 예상했다. 그보다는 아예 들어오지 않으면 더 좋다는 생각도 했다. 초저녁이나 다름없는 이른 시간이라서 현관을 들어서는 딸을 훑어보니 심상찮았다. 와락 울음이라도 터트릴 태세였다. 윤승희 어머니는 짐작이 들어맞는 것 같아서 심란했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서 서너 발자국을 걸으면 이 층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윤승희는 고개를 푹 수그려서 본체만체하고 재빠른 걸음걸이로 계단으로 올라섰다. 더욱더 좁아진 어깨가 울고 있었다. 이런저런 것들이 궁금해서 말을 붙여 보려고 살피다 그만둔다. 예감이 좋지 않은 터라 걱정이 앞섰다.

네가 웬일이냐?”

난데없이 민경혜가 뒤따라 들어왔다.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약속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어리둥절한 어머니라서 용건부터 캐묻는다.

좀 전에 만나서 같이 왔어요.”

민경혜가 큰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쭈뼛거렸다.

무슨 일이야?”

별일 아니에요.”

민경혜의 대답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딸이지만 마음이 넓어서 이해심이 많으며 긍정적이었다. 마음이 곱고 여린 성격이라서 순종적이며 참을성도 많다. 그런 딸이 저리할 정도면 예삿일이 아니라 생각했다.

만났니?”

.”

그런데 저 애가 왜 저러지. 싸웠니?”

그런 일 없어요. 어머니.”

엉겁결에 나온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민경혜는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남편에게서 벌써 두 번이나 전화가 왔었다. 아홉 시가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매우 흡족해했다. 전화가 또 올 것이다. 딸의 행동으로 봐서는 잘못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데이트에 기대가 큰 남편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답답했다.

남편은 핏덩이나 다름없는 김수곤을 사윗감으로 점찍어 놓고 공을 들이고 있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느냐며 말없이 따르는 중이었다. 민경혜는 모두가 일등 신붓감으로 여기고 있었다. 내로라하는 혼처에서 딸을 달라는 사람들이 줄이 서 있다. 거기에 비하면 별것 아닌 신랑감이다. 그런 김수곤에게 상처를 받고서, 침대에 얼굴을 처박아놓고 우는 딸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윤승희 어머니는 오히려 화가 솟구치고 있었다.

김수곤은 중학교에 진학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런 처지의 그가 무척이나 안타까운 담임선생이라서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 입학시험이라도 치르게 했는데 내로라하는 수재들이 모여드는 명문 중학교를 수석으로 합격했다. 그의 수석합격 소식은 온 동네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기옥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공부를 더 해봤자 달라질 것이 없다. 초등학교를 보낸 것만으로도 아들을 위해 죽을 고생을 했다. 낫 놓고 자를 몰라서 당했던 자신의 설움은 면한 아들이지 않은가. 장남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줄줄이 딸린 동생들을 돌볼 수가 있지 않은가.

자신처럼 농사를 지어서는 어림도 없다. 돈을 벌려면 기술을 배워야 하고 서울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다. 공부하고 싶으면 돈을 벌면서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장학생이므로 학비야 필요치 않지만, 하숙비는 대주어야 한다.

자신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들을 서울로 보내는 일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들의 수석합격 소식보다도 김기옥의 어이없는 생각과 행동이 더 화제가 되었다.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윤승희 어버지는 마치 자신의 자식 일이라도 되는 양 가슴이 아파했다. 부모의 어리석음으로 특출한 능력과 장래를 썩힐지도 모르는 어린아이라서 더 가슴이 아팠다. 김기옥과는 고향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고향에서 함께 자랐다. 그의 성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어리석기가 여전했다. 도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아들을 두고 어이없는 생각을 하는 것이 한심했다.

윤승희 아버지는 고심 끝에 김기옥을 찾았다. 김수곤이의 장래를 두고 설득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들먹여서 완강하게 고집을 피우는 주객이 전도된 대화였지만 모두 들어주어서 김수곤의 진학 길이 열리게 되었다.

윤승희 아버지의 기대처럼 한국법대에 진학했고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는 마치 자기 자식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기뻐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몇 날 며칠 동안 술과 음식을 대접했었다. 김수곤의 오늘이 있기까지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은인이지만 요즘 들어 너무나 차갑고 쌀쌀하다. 윤승희는 실망하는 아버지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져서 슬프고 미안했다.

…….”

엄마의 얼굴을 바로 볼 수가 없다.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기대가 크다. 내로라하는 혼처를 내쳐서 늘 아쉬워했다. 석연찮은 김수곤의 반응이 달갑잖아서 불만스러웠지만, 부녀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두고 봤던 엄마였다. 그렇지만 엄마는 오늘을 기회로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 여기며 좋아하고 있었다.

경혜야 무슨 일인지 말 좀 해봐라.”

민경혜도 굳이 말을 안 해도 알 수가 있는 상황이라서 해줄 말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한다 한들 도움이 되겠는가. 자칫하다가는 되레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될 수도 있다. 민경혜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수그려서 침대 위에 펴놓은 이불위의 꽃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벽에 걸린 시계 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없이 흘리는 윤승희의 눈물이 아주 매운 국물이 되었다. 국물 냄새가 방안을 진동시켜서 방 안 공기가 참을 수 없을 만큼 매워졌다.

사모님! 사장님 전화에요.”

아래층에서 가정부가 내지르는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세 번째나 전화를 걸어온 윤승희 아버지여서 남편의 전화에 가슴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괜히 아무런 잘못도 없는 가정부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미워져서 하는 말이었다.

전화한다고 해! 넌 목소리가 왜 그렇게 커? 목청 낮춰!”

윤승희 엄마는 자초지종을 듣지 않고도 알 수가 있었다. 하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고집을 피워서라도 부녀를 뜯어말리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경혜야. 못 만났니?”

…….”

그런데 왜 이제야 들어왔어?”

함께 술 마셨어요.”

그런데 왜 저 애가 울어!”

…….”

너도 알다시피 욕심내지 않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잘 됐어.”

그럼요. 왜 저러는지 저도 안타까워요.”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제 생각에는 그 사람 순수하지가 않아요. 너무나 야망이 커서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할 거예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

남편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말이 김 서방이라는 말이었다. 물론 단둘이 있을 때만 오가는 말이라서 부부만 아는 사실이기는 하다. 요즈음 들어 달라져 버린 김수곤의 태도를 보면 그의 속마음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지만,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남편이라서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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